한 줄 노트 206

아이히만은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한 책임을 맡음으로써/ 나호열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맡음으로써     나호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6년 동안) 때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 가담자로 이스라엘에서 교수형 되었다. 1942년 나치 고위관리로서 아이히만(1906-1962, 56세)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 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아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

한 줄 노트 2024.09.01

노고단과 마고(麻姑)할미/ 김동수

노고단과 마고麻姑할미      김동수    마고할미는 한국 신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신女神 또는 창조신이다. 마고할망, 마고할미, 마고할매, 혹은 마고선녀 등으로도 불린다. 본명은 마고麻姑이며 할미는 존칭이다. 한국 무속에서 창조신 위치에 있는 신神이었으나, 무속의 힘이 약해지고 외래 종교가 거듭 거듭 유입됨에 따라서 위상이 축소되어, 현재에 와서는 그냥 무속 신앙 속의 여신女神이 되었다.  지금도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정상에 돌탑이 있는데 원래는 '마고할미'의 의미가 '한어미(聖母· 神母 · 大母)인데, 이것이 '늙은老의 의미로 '노고老姑'라는 명칭으로 변이되었다고 본다. 노고단老姑壇은 신라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탑과 단을 설치하고 마고할머니께 나라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 줄 노트 2024.08.30

북소리 들려 명륜이 내려주는 풍경(부분)/ 김덕근

북소리 들려 명륜이 내려주는 풍경(부분)      김덕근    청주향교는 전국 향교 중에서 가장 가파른 곳에 자리합니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에서 내삼문까지 경사도를 보더라도 평지 향교와 다르게 유교적 위계를 알게 해줍니다. 흔히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라고 합니다. 강학 공간이 앞에 있고 제례 공간인 대성전이 뒤에 있는 형식이죠. 위에서 보면 말발굽형인 청주향교는 대성전을 위한 높고 긴 계단의 연속입니다.  '향교 건축은 엄격하게 대성전을 축으로 위계에 따라 있습니다. 위계의 시작은 문과 담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낮은 향교의 담장은 방어적 수단이 아니라 영역성 표지 안 밖을 구분함을 구분합니다. 밖에서 훤히 보일 정도지만 향교의 중심축에서 대성전은 자궁처럼 가장 깊숙이 자리합니다.  높은 장소에..

한 줄 노트 2024.08.13

창덕궁(昌德宮), 구중궁궐 속으로(부분)/ 박상일

창덕궁昌德宮, 구중궁궐 속으로(부분)      박상일/ 청주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된 1908년 무렵에 인정전의 내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회흑색의 전돌을 깔았던 실내 바닥을 서양식 쪽마루로 교체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문을 제외한 창문 아래의 외벽에 전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안쪽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을 설치하고 휘장을 달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대한제국의 상징 문장인 오얏꽃무의 5개가 장식되었다.  월대에는 전면과 좌우 측면에 계단이 있고 임금만이 오를 수 있는 전면부의 어계御階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그 중앙부의 답도踏道에는 봉황을 새겼다. 봉황..

한 줄 노트 2024.08.13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2 (부분)      정과리    전봉래는 '페노발비탈'을 먹고 죽어 가는 시간 속에서, "유서를 쓰기 전에 전축으로 가서 바하의 레코드판을 걸었2)"다. 그것을 두고 그의 아우는   바하의 음악은 치열한 인간적 삶의 갈구요 그 숭고한 승화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취한 이러한 작업에서도 나는 그의 죽음이 패배나 도피의 길이 아니요 오히려 그가 신념한 바와 같이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한 길, 즉 적극적 인간적 삶의 준열한 길임을 보는 것입니다.   라고 적었다. 이것이 전봉건과 김종삼의 시적 출발을 이룬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출발을 위해 디뎠던 판의 위치는 달랐다. 전봉건은 죽음의 행위 자체에 중심을 두었다면 김종삼은 '음악'에 발을..

한 줄 노트 2024.08.09

전봉래는 1951년 이른 봄 부산의 '지하다방' '스타'에서/ 정과리

전봉래는 1951년 이른 봄 부산의 '지하다방' '스타'에서(부분)      정과리    전봉래는 1951년 이른 봄 부산의 "지하다방 '스타'에서 페노발비탈 한 병을 먹음으로써 목숨을 끊"었다11). 전봉건의 묘사에 의하면 그 자살은 철저하게 의식적이었다. 전봉래는 약을 먹은 후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원고용지 두 장"의 "유서"를 썼다. 그의 마지막 장면을 아우는 이렇게 증언한다.   첫 장에서는 연필로 쓰여진 글줄기가 내리다지로 곧게 내려갔습니다만 다음 장에서는 옆으로 흐트러지고 기울어지면서 내려갔습니다. 페노발비탈은 수면제이지만 다량을 복용하면 목숨을 앗아가는 독약이 됩니다. 그 독한 약기운이 두 장째부터는 서서히 거의 시력과 연필을 잡은 손의 힘을 빼앗아 가기 시작한 것이 분명합니다.12)   ..

한 줄 노트 2024.08.06

어서 오세요, 궨당의 세계로(부분)/ 김은정(글·사진)

어서 오세요, 궨당의 세계로      김은정/ 글 · 사진         제주에는 주봉主峯인 한라산을 중심으로 측화산側火山이 가족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 마을에서 이웃으로, 가족으로 궨당으로 살아온 제주인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로 유명한 인류학자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최대 150명이라고 주장했다. 절친한 관계는 3~5명, 공감할 수 있는 사이는 15명, 이렇게 인연의 깊이와 관계를 확장해 나갈 때 그 최대치가 150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완벽히 타인과 차단된 채 살아가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더구나 내 고향 제주에서는 더 요..

한 줄 노트 2024.07.12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양순모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양순모/ 문학평론가    제의로부터 출발해 그것을 대체해 나간 비극은 희생 제의와 공통의 전제를 공유하지만, 비극은 그야말로 문학답게, 종교와 구별되는 문학만의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신들의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양태에 대한 경험은 '비극'과 '제의' 모두"에 공통적인 것으로, 다만 희생 제의는 '종교'적인 신을 자비로운 신으로 전환,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이 악마성과 파괴성을 "회피"하게끔 만든다. 또한 희생 제의는 당면한 폭력적 상황과 관련해 인간의 모든 권리와 책임을 신에게 양도함으로써, 철저히 "종교"적인 태도로서 당대의 악마적이고도 파괴적인 국면을 통화해 나간다. (해설, p. 147) ---------------------..

한 줄 노트 2024.07.03

옛말에 "성공자거(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이창섭

옛말에 성공자거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이창섭/ 前 동국대 역경원장    * 옛말에 "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공이 이룩되면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봄은 꽃을 피운 다음에는 떠나고 여름은 잎을 무성하게 한 후에는 떠나고 가을은 열매를 맺은 다음에는 떠나고 겨울은 곧 모든 식물의 죽음의 계절이다. 다음해 봄이 되면 또 다른 꽃이 피고 잎이 자라난다. 동물도 새끼가 자라나면 어미는 죽는다. 이른바 '신진대사'라고 하는 것이 이것인데 이 엄연한 자연의 법칙을 모르고 이름과 명예에 집착해서 천년만년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고 그 자리에 버티면서 떠날 줄 모르면 이른바 비참한 패배와 최후를 맛보게 되는..

한 줄 노트 2024.06.22

폴란드 한국문학의 대모, 할리나 오가렉 교수/ 이혜선

폴란드 한국문학의 대모, 할리나 오가렉 교수         이혜선    * 나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생명의 전화' 자원 상담원으로 상담활동을 한 적이 있다.  생명의 전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전화상담으로는 처음으로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던 때였다. 나는 2기 상담원으로 여러 분야의 교육을 받고 상담원 자격을 얻어, 주로 저녁 8시간대 철야상담을 맡아서 상담하면서 소그룹 모임으로 열심히 공부도 하였다. (p. 146)   * '' '한국어와 결혼한 여인'으로 불린 할리나 오가렉 교수는 그 후에 8년간의 작업 끝에 한국문학사를 탈고해 제1권 『한국고전문학』을 출간하고 2004년 작고했다. 제자 야니샤크 교수에 의해 1년 후 유고집으로 작업의 완결판인 『한국현대문학』이 출간되었다. 202쪽..

한 줄 노트 2024.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