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착
정숙자
뭉쳐진 의미가 고층에서 떨어진다
짐승들은 죽어서 먹히지만 인간은 먹혀서 죽는다
꿈을 감싼 비늘, 의지를 품었던 피와 살이 뜯겨져나간다
더 이상 먹힐 게 없어졌을 때
바람은 그를 벼랑으로 밀어버린다
반짝! 거품이 꺼진다
자살은 결국 타살이다
몇몇 범인을 지목할 수 없다
온 세상이 합세했으므로 한 목숨 나누어 먹었으므로 세
상은 더욱 활기를 띨 뿐
―그는 의지가 약했다
―그는 치밀하지 못했다
―그는 융통성 없는 인간이었다
손에손에 망치를 들고 죽은 이를 못 박는다
더러 애도하는 이도 있지만 주검에겐 위로가 되지 않는다
크릴은 고래에게 고래는 작살에 먹히는 바다
온갖 혈액 뒤섞인 바다
태양을 바수는 파도 속에서 아가미만 뻐끔거리는 그림자
는 죽음 너머를 살고 있다
모든 자살은 순교다
진짜로는 아무도 자살하지 않는다
-『애지』2003. 겨울호
-------------
*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이런, 이런/ 정숙자 (0) | 2010.10.02 |
---|---|
무인도/ 정숙자 (0) | 2010.09.30 |
이브 만들기/ 정숙자 (0) | 2010.09.28 |
열매보다 강한 잎/ 정숙자 (0) | 2010.09.27 |
김나현/ 정숙자 (0) | 2010.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