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177

이준관_동시조의 품격과 위상을 드높인···(발췌)/ 호박꽃 바라보며 : 정완영

호박꽃 바라보며 어머니 생각 정완영(시조시인, 1919-2016, 97세) 분단장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한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 -전문- ▶ 동시조의 품격과 위상을 드높인 정완영(발췌) _이준관(시인, 아동문학가) 정완영은 마흔이 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의 나이 44살 되는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조국」으로 당선되었다(1960년에 ⟪국제신보⟫에 당선되었지만 정식 등단은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다). 시조 「조국」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는 1960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골목길 담 모롱이」가 입선되고 1967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해바라기처럼」이 당선되어..

동시 2023.04.21

자고 가면 안 될까요? 외 1편/ 조정인

자고 가면 안 될까요? 외 1편 조정인 / 전미화 그림 나는 분홍 코를 가진 길고양이다. 그 집엘 간 건 그날이 세 번째였고 마지막이 되었다. 심장이 얼 것 같은 겨울 저녁이었다. 교회 담장 아래서 나는 검정 스타킹 누나를 기다렸다. 분홍 코, 아롱이! 불러 주는 누나를 따라가면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실은 그게 종일 내가 먹는 것의 전부다. 빌라에 거의 아 오자 나는 문 앞에 먼저 가 서 앉았다. 누나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렸다. 폴짝폴짝 계단을 뛰어오른 나는 501호 현관 앞에 멈췄다. "아롱이 왔구나. 조금만 기다려." 누나네 엄마는 매번 밥과 물을 차려 준다. 현관 안쪽 실내엔 고양이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계단에 놓인 종이 박스를 발견했다. 가슴이 뛰었다..

동시 2023.03.15

웨하스를 먹는 시간/ 조정인

웨하스를 먹는 시간 조정인 시 / 전미화 그림 그러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이모. 이모 집엔 눈이 파란, 잿빛 고양이가 산다. 엄마는 어림도 없지. 고양이라면 우선 눈이 무섭대. 내 생각엔, 고양이가 먼저 엄마를 무서워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코로나19가 가져다준 학교에 가지 않는 요즘. 나는 아예 짐을 싸서 이모 집에 왔다. 거실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고 이모와 나는 웨하스를 먹는다. 웨하스 포장을 뜯을 때는 마음부터 바스락거린다. 포장지 붉은 줄을 떼어 내는 손끝에서 자그만 행복이 실눈을 뜬다. 바삭바삭, 입 안에서 행복이 소리를 낸다. 이모는 이야기를 이어 가고······ 귓불에서 귀고리가 흔들린다. "그러니까, 사막을 지나던 루스팜이 도적 떼에 붙잡힌 노인을 구했대. 밤이 왔어. 사막의 ..

동시 2023.03.15

뼈대 있는 집안 외 1편/ 박해림

뼈대 있는 집안 외 1편 박해림 한평생 논일 밭일에 허리 굽은 우리 할아버지 우리 집안은 말이다! 대대로 내려는 뼈대 있는 집이야··· 선조 할아버지는··· 하고 자랑하실 때마다 밭둑 뙤약볕 아래 허리 꼿꼿이 세운 옥수수가 긴 수염을 쓰다듬는다 바람이 불 때는 어험! 헛기침 소리도 들린다 -전문(p. 80-81) ----------------- 서 말 닷되 할머니가두 손 받쳐 콩자루를 이고 간다 할머니, 무거워요? 응, 얼마나 무거워요? 많이! 무게가 얼만데요? 서 말 닷되 서 말 닷되가 뭐예요? 응. 응. 응··· 아주, 아주 많이 무겁다는 말이야 -전문(p. 94-95) / ( 블로그註: 그림은 책에서 일독 要) ----------------- * 동시집 『간 큰 똥』에서/ 2022. 11. 30. ..

동시 2023.01.03

간 큰 똥/ 박해림

간 큰 똥 박해림/ 글 · 그림 개똥 한 무더기 스쿨존에서 시속 30킬로 찻길을 막고 있다 속도 무시하고 달리던 차들 똥 밟을까 봐 팍! 속도를 줄인다 예뻐 죽겠다는 듯 백구 머리 쓰다듬는 아이들 그런데 너, 되게 간이 크다! 겁도 없다 -전문(p. 20-21) / (블로그註:그림은 책에서 일독 要) 시인의 말> 한 문장: 동시는 나를 나답게 돌려세우는 힘을 가졌다. 내 속에서 나를 찾아내는 힘을 주었다. 아이들을 다시 발견하고 작을수록 더 크게 나눌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오래 미뤄 놓았던, 바빠서, 바빠서라는 핑계로 밀어냈던 마음, 그 속에 꼭꼭 숨겼던 마음, 보고도 일부러 안 본 척 모른 척했던 마음들이 차마 떠나지 못하고 함께 놀자며 내미는 따뜻한 손을 잡는다. (p. 5) (저자) ------..

동시 2023.01.03

줄넘기/ 오진경

당선작 中 줄넘기 오진경 줄넘기를 할 때 머리 위로 산이 생긴다 산이 내 발 밑을 휘익 지나갈 때 나는 포올짝 산을 넘는다 벌써 백번도 넘게 산을 넘었다. -전문(p. 53) * 심사평: 오선자(아동문학가) -------------------------- * 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 2022-겨울(27)호 당선작 中 * 오진경/ 1972년 부산 출생, 2022년 입선, 시집『당신은 참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산문집『선율로 흐르는 행복』

동시 2022.12.17

징검다리 건너기/ 이상현

징검다리 건너기 이상현 신발을 벗지 않고 물 위를 건너뛴다 내 그림자도 뛰어 넘는다 내가 젖지 않고 즐겁게 건널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이어놓은 다딤돌 몇 개 그 고마움이 물에 놓여 늘 젖어있기 때문이다. -전문 (p. 334) --------------------------------- * 『월간문학』 2022-7월(641)호 에서 * 이상현/ 1962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 동시집『스케치』『햇빛마을 가는 길』등

동시 2022.09.21

바람의 뼈/ 박선미

바람의 뼈 박선미 축구하다 너무 더워 나무 그늘에 앉아 가방 속에 있던 가정통신문으로 손부채를 만들었다. 흐느적거리는 바람이 안타까웠던지 옆에 계신 할아버지가 쥘부채를 빌려주셨다. 시원한 바람이 부챗살에서 나온다. 바람도 뼈가 있어야 단단해진다. -전문(p. 246) ------------------ * 『시와소금』 2022-가을(43)호 에서 * 박선미/ 1999년 창주문학상 수상으로 &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동시집『지금은 공사중』『불법주차한 내 엉덩이』『누워있는 말』『햄버거의 마법』『먹구름도 환하게』

동시 2022.08.30

엄마는 멀었다 외 1편/ 임지나

엄마는 멀었다 외 1편 임지나 아쉽다는 듯 손 흔들고 두 팔로 하트를 만들더니 유치원 차 태우자마자 엄마가 휙 돌아서 뛴다 아침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다 신호에 멈춰 선 버스 엄마 등을 끝가지 바라봤다 엄마는 멀었다 내 사랑 따라오려면 -전문 (p. 57) --------------- 햄스터 꽃 햄스터 무덤에서 해바라기 싹이 났어 푸른 줄기 쭉쭉 뻗어갔지 햄스터가 물고 있던 씨앗이 싹을 틔웠을 거라고 아빠는 말했어 그렇게 자그마하면서 큰 꽃도 피우네 샛노란 해바라기 꽃에선 햄스터 냄새가 나겠지 햄스터 향기 노랗게 퍼지겠지 슬프게 번지겠지 -전문 (p. 23) ------------------ * 동시집 『꼬리 흔드는아이』에서/ 2020. 12. 20. 펴냄 * 임지나/ 전북 전주 출생, 2015년 『시와소..

동시 2022.08.18

마트료시카/ 임지나

마트료시카 임지나 어, 어 조심해라 할아버지가 감 따는 아빠를 바라보고 아빠는 자전거 타는 나를, 나는 자전거 타는 동생을 동생은 세발자전거 타는 예서를 할아버지가 아빠 숟가락에 고기를 올려주고 아빠는 엄마 숟가락에 엄마는 내 숟가락에 난 동생 숟가락에 이젠 할아버지 안에 푸른 하늘··· 하늘 안에 아빠, 아빠 안에 엄마, 엄마 안에 나, 내 안에 동생, 동생 안에 더 작은 동생, 겹겹이 겹겹이 제일 단단해진 열매 같은 우리 -전문- 해설> 한 문장: 할아버지를 없애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시간 여행의 모순을 뜻하는데 "할아버지의 역설"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존재해야 하고 아버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는 마트료시카 인..

동시 2022.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