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가면 안 될까요? 외 1편
조정인 / 전미화 그림
나는 분홍 코를 가진 길고양이다.
그 집엘 간 건 그날이 세 번째였고
마지막이 되었다.
심장이 얼 것 같은 겨울 저녁이었다.
교회 담장 아래서 나는 검정 스타킹 누나를 기다렸다.
분홍 코, 아롱이! 불러 주는 누나를 따라가면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실은 그게
종일 내가 먹는 것의 전부다.
빌라에 거의 아 오자 나는 문 앞에 먼저 가 서 앉았다.
누나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렸다. 폴짝폴짝
계단을 뛰어오른 나는 501호 현관 앞에 멈췄다.
"아롱이 왔구나. 조금만 기다려."
누나네 엄마는 매번 밥과 물을 차려 준다.
현관 안쪽 실내엔
고양이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계단에 놓인
종이 박스를 발견했다. 가슴이 뛰었다.
밥을 다 먹은 나는 뜸을 들이며
누나네 엄마와 박스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저 상자에서 자고 가면 안 될까요?"
내 말을 알아들은 누나네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왔다.
사뿐사뿐······ 가볍고 명랑한 건 나의 특기다.
-전문(p. 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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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가게 앞엔 이제 울긋불긋한
전단지만 어지럽게 날린다.
'저희 가게를 찾아 주신 선생님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낡은 셔터엔 이런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골목 입구 조그맣고 납작한 슈퍼마켓은
내 친구 민이네 가게였다.
이제는 굳게 문이 닫히고
'민이네 슈퍼마켓' 간판만
왼쪽으로 기운 채 혼자 남았다.
민이네 아빠는 털 빈, 왼쪽 소매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내가 모르는 먼 마을, 민이 사는 그곳에도
지금쯤 코스모스가 한창인 걸까?
-전문(p. 92-93)
* 블로그註: 그림은 책에서 감상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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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집 『웨하스를 먹는 시간』 에서/ 2021 10. 11. <문학동네> 펴냄
* 시) 조정인/ 1998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장미의 내용』『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새가 되고 싶은 양파』
* 그림) 전미화/ 동시집『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그림 & 글), 그린 책『달려라 오토바이』『너였구나』『그러던 어느 날』『섬섬은 고양이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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