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를 먹는 시간
조정인 시 / 전미화 그림
그러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이모.
이모 집엔 눈이 파란, 잿빛 고양이가 산다.
엄마는 어림도 없지. 고양이라면 우선 눈이 무섭대.
내 생각엔, 고양이가 먼저 엄마를 무서워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코로나19가 가져다준
학교에 가지 않는 요즘. 나는 아예 짐을 싸서
이모 집에 왔다.
거실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고
이모와 나는 웨하스를 먹는다.
웨하스 포장을 뜯을 때는 마음부터 바스락거린다.
포장지 붉은 줄을 떼어 내는 손끝에서 자그만 행복이 실눈을 뜬다.
바삭바삭, 입 안에서 행복이 소리를 낸다.
이모는 이야기를 이어 가고······ 귓불에서 귀고리가 흔들린다.
"그러니까, 사막을 지나던 루스팜이 도적 떼에 붙잡힌 노인을 구했대. 밤이 왔어. 사막의 밤은 춥고, 루스팜은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지폈어. 불을 쬐던 노인이 소원이 뭐냐고 물었어. 노인은 사실 마법사였더. 루스팜은 손사래를 쳤지. '아녜요. 모닥불은 따뜻하고, 연기는 향긋해요. 밤하늘 별들은 쏟아질 듯 반짝이고······ 아름다운 게 여기 다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그러자 노인은 연기 한 줌과 너울거리는 불꽃 한 송이, 빛나는 별 두 개를 양손에 모아 쥐고, 숨을 불어넣었어. 손을 펴자 세상에! 새끼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지 뭐니. 털은 연기처럼 푸른 잿빛이고, 두 눈은 별처럼 빛나고 혀는 불꽃처럼 붉었어. 이렇게 아름다운 것 세 가지가 모여 태어난 게 바로 고양이란다."*
고양이 제제는 내 무릎에 턱을 얹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고양이의 잠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봄날의 햇살 한 주먹? 여름날 뭉게구름 한 덩이?
-전문-
* 페르시아의 고양이 탄생 설화 참고.
해설> 한 문장: 표제작인 이 시는 존재의 둘레를 맛보는 시간으로 꽉 차 있다. 이 존재감은 대개 비가시적으로 체감된다. 현실(코로나19)의 시란으로부터 비껴난 나는 비현실의 고양이( 설화 속 고양이)를 통해 현실의 고양이(눈이 파란 제제)를 본다. 나는 다시 제제를 통해 비현실(잠의 질료)을 꿈꾼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이모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이 시에선 이모가 물구나무서기를 대체하는 셈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각과 분위기를 수렴한 실체의 대유로서 웨하스가 등장한다. 여기서 단번에 떠오르는 감각은 청각과 미각이다. 바삭바삭 소리를 내는 행복의 맛이다. 이 행복은 각 존재가 제 고유성을 지키며 생명(심장)의 화음에 참여할 때만 가능한 것이리라.
조정인 시인의 동시에서 또 하나 유의 깊게 살펴봐야 할 지점은 직접적 만남의 표현 방식이다. 이 방식은 시인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대상과의 만남이 대개 위선적, 표피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자기표현의 적극적 발로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p. 시 20-22/ 론 108-109)
* 블로그註: 그림은 책에서 감상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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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집 『웨하스를 먹는 시간』 에서/ 2021 10. 11. <문학동네> 펴냄
* 시) 조정인/ 1998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장미의 내용』『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새가 되고 싶은 양파』
* 그림) 전미화/ 동시집『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그림 & 글), 그린 책『달려라 오토바이』『너였구나』『그러던 어느 날』『섬섬은 고양이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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