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허공 수도원/ 이종섶

검지 정숙자 2020. 1. 26. 21:52

 

 

    허공 수도원

 

    이종섶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나무 위 까치집

  저런 곳에 누가 올까 싶지만

  그렇다고 문을 닫는 일도 없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수도원이라

  바람이 쉬었다 가고 햇볕이 머물다 갈 뿐

  작은 새들의 인기척 하나 없어

  외딴 수도원이 되어 간다

  새끼들이 까고 나온

  동그란 껍질의 온기가 남아있는지

  나무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커다란 대문을 하늘로 내고서는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순례하는 나뭇잎들이

  문 앞을 기웃거려도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상을 뒤란으로 삼은 수도원 한 채

  지나가는 행인이 고개 들고 쳐다봐도

  무슨 수행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고개만 아픈데

  긴 원행을 다녀온 수행자는

  세상을 편안하게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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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19-겨울호 <신작시> 에서

  *  이종섶/ 2008년《대전일보》신춘문예로 시 부문 & 2016년《광남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당선, 시집『물결무늬 손뼈 화석』『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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