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빈손
최형심
오래된 문가에 엎드린 고요를 밟을 때, 사방으로 달이 떨어져 우편함마다 가득했다.
물고기들이 물결에 얼굴을 묻고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물소리를 듣는 밤,
양철지붕 아래를 기어가는 쥐새끼들은 잘 죽지도 않았다. 해안을 넘어온 검푸른 물소리가 빈 병 속으로 쏟아지고
등피를 씻었다. 물은 차고 이슬은 희게 빛났고 제 몸을 불사르지 않아도 활자들은 검었다. 오래된 엽서가 마르는 동안
별빛을 쫓으며 장지뱀의 겨울잠이 은신처로 돌아갔다는데……, 소멸하는 것들 사이에서 사랑을 나누는 쥐들의 발소리를 들었을 뿐
귀를 잃은 나무들이 모래언덕 근처에 모여 있었다. 어둠 속에 흩어진 꽃들이 희끗희끗했다. 새벽과 헤어지는 은어 떼가 입안을 헹구고 간 뒤,
자주 아픈 것들과 반만 열린 창문 사이를 지나 눈目을 지웠다. 보이지 않아 선명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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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2019-겨울호 <신작시>에서
* 최형심/ 2008년『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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