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유예기간/ 이해존

검지 정숙자 2020. 1. 20. 02:14

 

    유예기간

 

    이해존

 

 

  1.

  닥칠 거면 빨리 닥치는 게 낫다

  그런 마음으로 참석하는 탁자는 빈집처럼 넓다

 

  대화는 수십 개로 쪼개져

  벗어놓은 신발처럼 제각각이다

  눈동자가 한 곳으로 향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도열한 박수가 펼쳐졌다 접힌다

 

  2.

  주사위가 떠 있는 시간만큼의 유예

  그 후 닥칠 긴 시간

 

  주사위처럼 쥐었다 흔들어 펼쳐 놓고

  자, 너도 해봐,

  나올 수 있는 숫자보다

  많은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결정된 것들 속에 있다

 

  균열이 시작된 벽 앞에서

  공포로 뻗어나가기 전에

  어서 무너지라고

 

  3.

  남아 있는 것들을 빨리 걷어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벤치 옆자리에 가방을 앉히고

  가방 속을 휘젓는다

 

  뒤늦은 소명이라도 뒤적거리는 것처럼

  손을 빼다 주사위처럼 떨어지는 것

  한 면을 오래 들여다보다

 

  어쩌면 나를 닮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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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사람』 2019-겨울호 <시와사람 초대석>에서

  * 이해존/ 2013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