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노지영_ 칸칸이 캄캄해질 때까지(발췌)/ 책 : 신용목

검지 정숙자 2020. 1. 22. 00:18



   


    신용목



  종이 위로 생각이 지나갔다 그걸 읽으려고 형광등이 빗소리처럼 흰 목을

  그러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요하게


  늘어뜨렸지만


  생각은 이미 나를 지나가 버렸고 지금은 종이와 손가락과 툭 끊어진 채

  하얗게 굴러다니는 머리의 밤, 불을 끈다


  어둠이

  생각을 감싼 표지라면


  제목은 지나갔다


  제목 없는 표지면 어떤가, 아무리 찢겨도 맨 앞 장이 표지겠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찢어 내도 그대로인

  생각처럼

  비,

  젖는 일에는 입구가 없어서


  책을 읽는다


  죽은 자의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아 있다, 죽은 자를 깨웠다가 다시 죽인다


  찢겨 나간 페이지다 또 한권씩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

  그러니까

  무수한 낙엽들이 한 권씩 책의 무게로 떨어지고 있다 무수한 바닥을 찢으며

  비,

  가스불로 끓이는 것 같은 비

  아무리 졸여도 결정되지 않는 글자로 자글대다 간신히 피어오르는

  비,

  짜질 줄도 모르고


  바닥에 달라붙어

  네,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생각인 줄도 모르고

  꿈속에서, 당신은 내 앞에서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 있어요 듣지 못한 채

  비행기가 지나갔습니다 나에게 나를 묻는 당신

  맞아요, 당신에 대해서라면 당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책이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바람이 흔들어 보는 십자가,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불빛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군요 은총에선 우산 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습니다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을 여러 칸으로 나눠 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는데

  다음 버스에도 같은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전문-

 

 

   ▶ 칸칸이 캄캄해질 때까지/ 최근 신용목의 시를 읽고 (발췌)_ 노지영/ 시인

   생각과 고통의 무게 때문일까. 그의 시에서 찢어진 모든 것들은 바닥을 향한다. 책을 향하던 시인의 시선은 이제 바닥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특이하게도 그의 신작시 3편에 "바닥"이란 시어가 모두 등장하는데, 이러한 '바닥'은 어떤 실체적 제목을 가진 책보다 강렬한 물질성으로 그를 뒤흔드는 실재다. 그러한 바닥은 몰아치는 "비"로 인해 위에서 아래의 방향으로 속절없이 파이고 있지만, 또한 그 표면은 "가스불로 끓이는 것"같이 아래로부터 격렬하게 올라오는 것이기도 하다. 위에서 떨어지는 힘과 "아무리 졸여도 결정되지 않는 글자로 자글대다 간신히 피어오르는" 아래로부터의 힘이 한데 만나는 장소가 바로 바닥인 것이다./ 위에서부터 낙엽과 같이 떨어져 쌓이는 것들과 아래로부터 자글대는 글자들이 동시에 스며 있는 바닥은 시인이 "달라붙어" 누워 있는 장소이자, 무의식의 심연처럼 파고들어 가야 할 궁극의 자리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힘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힘이 겹쳐지며, 하나의 층을 이룰 때, 새롭게 읽어야 할 거대한 책의 페이지도 펼쳐지게 된다. '바닥'이라는 것의 중첩된 은유가 시적 합리성을 확보해 주기에, 이제 시인은 더 강렬하게 들끓는 새로운 심연으로도 파고들 수 있게 되었다. 사유의 암실에서 꿈의 영역으로 더욱 대담하게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포착 불가능하던 생각들은 표면으로 떠오르고, 분절화된 생각들은 무의식의 그물망 속에서 새로운 연결 구조를 보여 준다. 꿈의 검열 속에서 불빛, 바람, 빗방울들로 위장된 존재들은 자리를 바꾸며 출몰하고, 비행기, 버스와 같이 변형된 운동성을 가진 이동 수단들도 오가게 된다. 그토록 혼란하게 움직이는 것들 사이엔 물론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도, 비를 막아주는 "우산"의 "은총"도 있다. 이들 대상이 뒤죽박죽되어 논리적 순서 없이 출현하면서, 꿈의 영역에서는 다른 존재로 이전을 거듭하는 대상들의 운동성이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한 운동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존재의 경계는 더욱 흐릿해진다. 몽상과 환상의 경계도 흐릿해진다.(P, 66 -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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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 2019-겨울호 <작가연구 1/ 신용목 -신작시/ 작품론>에서

   * 신용목/ 2010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봤다』『나의 끝 거창』등

   * 노지영/ 2010년『내일을 여는 작가』등으로 평론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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