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기간
이해존
1.
닥칠 거면 빨리 닥치는 게 낫다
그런 마음으로 참석하는 탁자는 빈집처럼 넓다
대화는 수십 개로 쪼개져
벗어놓은 신발처럼 제각각이다
눈동자가 한 곳으로 향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도열한 박수가 펼쳐졌다 접힌다
2.
주사위가 떠 있는 시간만큼의 유예
그 후 닥칠 긴 시간
주사위처럼 쥐었다 흔들어 펼쳐 놓고
자, 너도 해봐,
나올 수 있는 숫자보다
많은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결정된 것들 속에 있다
균열이 시작된 벽 앞에서
공포로 뻗어나가기 전에
어서 무너지라고
3.
남아 있는 것들을 빨리 걷어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벤치 옆자리에 가방을 앉히고
가방 속을 휘젓는다
뒤늦은 소명이라도 뒤적거리는 것처럼
손을 빼다 주사위처럼 떨어지는 것
한 면을 오래 들여다보다
어쩌면 나를 닮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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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2019-겨울호 <시와사람 초대석>에서
* 이해존/ 2013년《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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