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칭의 공간
김제욱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공던지기를 한다. 아이가 던진 공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공을 기다리다 말고 놀이터를 지우는 사람이 있다. 해 기울자, 놀이터에는 대낮의 소란 대신 찬 공기가 몰려들어 한낮의 열기를 잠식한다. 한 공기에, 짙어지는 어둠 속에 점점 부풀어 오르는 그림자의 고요가 있다. 그 둘레를 지키며 공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오래된 시소나 그네 따위의 삐걱거림을 바람결에 듣는 사람이 있다. 빛을 받아내는 나뭇잎처럼 눈부신 마음으로 그대를 떠올린다.
어디든 닿을 수 있는 말을 따스하게 감쌀 수 있었던 한 시절이 사라진다. 무인칭의 공간에서 눈을 감고 다시 떠보면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다. 아침과 밤이, 계단의 끝과 시작이, 물의 오름과 내림이, 빗물에 모래알 씻기어 내리듯, 삶이 아닌 생의 이름으로 이어진다.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다른 말이, 하나의 길로 뻗어가가, 소멸한다. 무인칭의 겨울, 생명이 숨는다. 부끄러움을 감춘다.
사람의 온기를 담을 수 있을 때까지, 찬 바람을 견딘다. 흰 눈처럼 잠시 생이 포근할 수 있겠다. 다짐한다. 혹자는 십자가라 말했고, 아버지라 부르는, 바람에 흩어지는 해체의 신비함으로 들어간다. 동굴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이곳은 죽음마저 웅크린 축제장.
호흡이 맑아지려면 나를 잊어야 했다.
그는 점점 투명하고,
공은 오지 않는다.
-전문-
▶ 굳은 심장에 피는 꽃(발췌)_ 장은석/ 문학평론가
이 시에는 압축된 시간의 흐름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때때로 공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짧은 순간으로 일생의 시간이 스밀 때가 있지 않나요. 그저 공을 주고받는 것일 뿐인 이 단순한 행위의 반복 속에 시적 순간이 깃들일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문득 비로소 한 시절이 사라지고 다른 시절이 도래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주체로서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잠시 잊게 되는 순간, 분명한 경계가 사라지고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잠기게 되는, 그 아득하고도 막막한 순간을 '인칭이 사라지는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을 던지고 받는 반복을 통해서 시인은 아침과 밤의 반복과 계절과 세월의 흐름의 반복을 떠올립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요. 구체적인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디든 닿을 수 있는, 따스하게 감쌀 수 있는 말"이 사라졌다는 부분이나 "사람의 온기를 담을 수 있을 때까지, 찬 바람을 견딘다"는 부분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시인은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점점 말을 잃고 자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운명에 관한 질문을 슬그머니 우리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된 로큰롤 소년은 "호흡이 맑아지려면 나를 잊어야 했다"고 고백합니다. 압축된 시간이 담긴 특별한 시적 순간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어떤 사람의 초상과 마주하는 사람의 고백은 나지막하면서도 절실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어쩌면 우리를 조금 다른 질문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에는 왜 십자가가 함께 놓여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소년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만 등장할 수 있는 것일까. 따스한 말은 희생을 통해서만 빚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 외에도 각자 얼마든지 더 많은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답에 수렴하기보다 하나의 질문이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이상하고 신비로운 파장을 펼쳐내는 것이야말로 시의 리듬이 지닌 놀라운 힘이 아닐까요.(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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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2019-12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작품론> 에서
* 김제욱/ 시인, 2009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라디오 무덤』, 한서대학교 융합교양학부 교수
* 장은석/ 문학평론가,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대표 저서『리드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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