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책/ 신용목

검지 정숙자 2020. 1. 13. 16:06

 

 

   

 

    신용목

 

 

  종이 위로 생각이 지나갔다 그걸 읽으려고 형광등이 빗소리처럼 흰 목을

  그러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요하게

 

  늘어뜨렸지만

 

  생각은 이미 나를 지나가버렸고 지금은 종이와 손가락과 툭 끊어진 채

  하얗게 굴러다니는 머리의 밤, 불을 끈다

 

  어둠이

  생각을 감싼 표지라면

 

  제목은 지나갔다

 

  제목 없는 표지면 어떤가, 아무리 찢겨도 맨 앞 장이 표지겠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찢어내고 찢어내도 그대로인

  생각처럼

  비,

  젖는 일에는 입구가 없어서

 

  책을 읽는다

 

  죽은 자의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아 있다, 죽은 자를 깨웠다가 다시 죽인다

 

  찢겨나간 페이지가 또 한 권씩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

  그러니까

  무수한 낙엽들이 한 권씩 책의 무게로 떨어지고 있다 무수한 바닥을 찢으며

  비,

  가스불로 끓이는 것 같은 비

  아무리 졸여도 결정되지 않는 글자로 자글대다 간신히 피어오르는

  비,

  짜질 줄고 모르고

 

  바닥에 달라붙어

  네,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이 생각인 줄도 모르고 꿈을

  꿈속에서, 당신은 내 앞에서 나를 찾고 있습니다 여기 있어요 듣지 못한 채

  비행기가 지나갔습니다 나에게 나를 묻는 당신

  맞아요, 당신에 대해서라면 당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책이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바람이 흔들어보는 십자가,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

  불빛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는군요 은총에선 우산 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습니다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한 사람을 여러 칸으로 나눠담고 있었습니다 나는 꿈속에서도 깨어 있는데

  다음 버스에도 같은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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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2020-1월호 <특집/ 자선 대표시>에서

   * 신용목/ 2000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나의 끝 거창』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