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가을 들판을 거닐며 외 1편/ 허형만

검지 정숙자 2019. 12. 14. 13:10

 

 

    겨울 들판을 거닐며 외 1편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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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숲길 누리장 나무 아래

  검정 상복 입은 개미들이

  참매미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이미 여름은 끝났는데

  한순간의 작렬했던 외침은

  지금쯤 어느 골짜기를 흘러가고 있을까

  오후 여섯 시, 햇살이 서서히 자리를 뜨는 시간

  부전나비 한 마리

  누구 상인가 하고 잠시 기웃거리다 떠나가고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지리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숲을 끌고 하는 개미들의 행렬

  숲은 가랑잎처럼 가볍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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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2019-12월호 <이 시대 창작의 산실/ 대표시>에서

  * 허형만/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1973년『월간문학』으로 시 부문  & 1978년『아동문학』에 동시 부문 등단, 시집『불타는 얼음』『나뭇잎은 물고기를 닮았다』등, 활판시선집 『그늘』, 일본어시집耳を葬る(2014) , 중국어시집許炯萬詩賞析(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