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통화음이 길어질 때/ 진혜진

검지 정숙자 2019. 12. 18. 01:40

 

  통화음이 길어질 때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맛이고 흔적인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빈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 고별이라는 걸 알았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탑이 물컹하다

 

 

--------------

*『포지션』 2019-겨울호 <POSITION ① 블라인드 시 읽기/지난호의 시인_자선 대표시>에서

* 진혜진/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