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펜잡이
설태수
권총처럼 볼펜 하나 차고 다니면서
벼랑에 핀 꽃이나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흐르는 눈물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보고
너희들, 정체를 밝혀라, 하면서
펜을 빼들어 그들을 겨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한밤중 골방에서도 그런다.
그렇게 정조준하다 보면
눈물도 고통도 슬쩍 속살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어느 틈엔가 그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얌마, 니 정체나 밝혀라.
너는 도대체 뭐냐?
어떨 땐 까닭 없이 눈물 흘리고
직접 가본 적도 없는 지옥과 천국이라는 곳을
멋대로 상정하는 너, 이상한 족속 아니냐?
자꾸 캐묻는 그들의 물음에
내가 꺼낸 펜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이마 정중앙을 겨누고 있었다.
*『시와표현』2011-봄(창간호), <신작시 광장>에서
* 설태수/ 경남 의령 출생, 199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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