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 비파, 비파를 켤 때
권현형
강남 한복판에서 생각이 비파나무 젖은
잎사귀처럼 너울거릴 때가 있다
비파, 비파, 비파를 본 적도 없는 악기를 켤 때가 있다
비가 오니 내가 멀리 있다
고대 인도의 소가 되어 무거운 짐을 달구지에 싣고
일 유순 이 유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부터
멀어진다 멍석을 말듯 안쪽으로 안쪽으로
나는 걸어 들어온다 찻물을 끓일 때도 밥을 지을 때도 늘
웅크리고 있던, 불안해하던 오른쪽 발만 데리고 온다
나와 상관없는 지혜의 길고 찢어진 눈동자가
오래 오래 바깥을 응시할 때
도너츠 가게와 막걸리 주점과 재즈 바와 택시와
설탕으로 만든 사람들이 북적대는 제 4의 공간이
인도의 시타림 같다
누가 야차인가? 당신인가 나인가
날마다 고층 빌딩에서 고공 고행하는 자들인가
늙은 아소카 나무 옆구리에서 태어난 자들은
열 두 시간을 기차 바닥에 숲속의 수행자처럼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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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문 계간지『주변인과시』2011-봄호, <초대시>에서
*권현형/ 1966년 강원 주문진 출생, 1995년『시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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