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비파, 비파, 비파를 켤 때/ 권현형

검지 정숙자 2011. 3. 16. 02:13

 

 

   비파, 비파, 비파를 켤 때


     권현형



  강남 한복판에서 생각이 비파나무 젖은

  잎사귀처럼 너울거릴 때가 있다

  비파, 비파, 비파를 본 적도 없는 악기를 켤 때가 있다


  비가 오니 내가 멀리 있다

  고대 인도의 소가 되어 무거운 짐을 달구지에 싣고

  일 유순 이 유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부터

  멀어진다 멍석을 말듯 안쪽으로 안쪽으로

  

  나는 걸어 들어온다 찻물을 끓일 때도 밥을 지을 때도 늘

  웅크리고 있던, 불안해하던 오른쪽 발만 데리고 온다

  나와 상관없는 지혜의 길고 찢어진 눈동자가


  오래 오래 바깥을 응시할 때

  도너츠 가게와 막걸리 주점과 재즈 바와 택시와

  설탕으로 만든 사람들이 북적대는 제 4의 공간이


  인도의 시타림 같다

  누가 야차인가? 당신인가 나인가

  날마다 고층 빌딩에서 고공 고행하는 자들인가


  늙은 아소카 나무 옆구리에서 태어난 자들은

  열 두 시간을 기차 바닥에 숲속의 수행자처럼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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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전문 계간지『주변인과시』2011-봄호, <초대시>에서

  *권현형/ 1966년 강원 주문진 출생, 1995년『시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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