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머리카락은 즐겁다/ 정영선

검지 정숙자 2011. 1. 8. 00:23

 

     머리카락은 즐겁다


     정영선



  과묵하다 그는

  이혼남이라 한다

  아들과 함께 고양이를 기르는 남자

  까만 펜던트 목걸이를 하고

  올이 군데군데 풀린 청바지를 입고 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6번을 들으면서

  손은 커트를 하고

  눈은 어디 먼 데를 가 있다

  손님이었던 여자

  사랑을 먼저 고백하고 아내가 된 여자

  집 나간 여자를 안고 있는지 모른다

  두개골을 꾹꾹 누르는

  깊숙한 머리카락 속을 헤매는 손은

  바이롤린 활만큼 부드럽고 힘이 있다


  꿈틀대는 눈썹 아래 눈은

  그 전 날 내내 마신 술잔 속 수평선

  바닥에 수북이 널린 머리털에 무신경하듯 

  여자들 시선과 수다를

  운동화 뒤축으로 밟아버린다


  퍼머를 만 후

  책을 방석에다 받쳐주고

  차를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오페라하우스 의자에 푹 파묻힐 때

  중화제를 발라야 할 시간이라고


  머리카락은 그 손을 기억하고 날마다 자란다



   * ≪현대시≫ 2011년1월호-신작시

   * 정영선/ 부산 출생, 1995『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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