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밥의 힘/ 김상미

검지 정숙자 2011. 1. 8. 00:18

  밥의 힘


   김상미



  악몽에 가위 눌려 식은 땀 흘리다 깨어나 밥을 먹는다. 새벽 3시. 배추김치를 쭉 찢어 밥을 먹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새하얗다. 귀신같다. 귀신처럼 외롭다. 어두움을 틈타 창가로 몰려든 나무 그림자들이 낄낄거리며 유령 행세를 한다. 하지만 나는 밥과 함께 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절절 끓는 공기를 무찌르는 데는 밥 만한 장수가 없다. 밥도 그걸 알기에 꿀맛같이 든든한 자신을 귀신보다 더 외로운 내 뱃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다. 희붐히 동쪽 지붕이 밝아온다. 뱃속이 꽉 찼으니 이제 악몽 퇴치는 시간문제다. 창문을 열자 창가에 눈을 갖다 붙이고 나를 염탐하던 나무들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시침을 뗀다. 나는 씨익 웃으며 씩씩하게 부엌으로 나가 다시 밥을 짓는다. 밥은 삶의 성기다. 그를 품기 위해 새 아침이 빠르게 밝아오고 있다.



  *《예술가》2010-겨울호,「시인해부」에서   

  * 김상미/ 부산 출생, 1990년『작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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