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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조선시대 정초부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그는 시에 재능이 있어 양반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그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김홍도는 그의 시에 감명을 받아 '도선도'라는 그림을 남겼는데 시의 내용을 풀면 다음과 같다
쪽빛처럼 푸른 강물 위에 두세 마리 해오라기가 앉아 있어 그 푸름과 흼이 대비되었다 가까이 가고자 천천히 노를 저었으나 고요한 물 위에 울리는 노 젓는 소리에 놀라 해오라기들은 모두 날아가버렸다 이제 깊고 푸른 물만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석양의 붉은빛이 내려앉았다
지금 내 눈앞에도 강이 흐르고 있노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 해오라기는 아니어도 오리 정도는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를 저어 오리에게 다가갈 수는 없지만 카메라의 줌을 최대한 당겨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오리가 하염없이 물에 고개를 박는 것을 렌즈를 통해 지켜보느라 어둠이 내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두운 실내에 웅크리고 앉은 새벽 나와 말을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모든 일을 시로 적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구나 정초부는 가난하고 쓸쓸하게 늙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안타까이 여겨 그의 흩어진 작품을 모아 필사하여 선집을 묶었다고 한다 그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 시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구나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물 위로는 새도 없고 석양도 없고 그저 어두운 빛만 흐르고 있었으며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문(p.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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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결』 2024-봄(창간)호 <신작 마당/ 시>에서
* 황인찬/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외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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