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정리움
말이 쌓인다
한 말과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이 쌓인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를 잃고 떠돈다
떠도는 말은 스스로 소멸하고 싶다
관계를 잃는다는 것은 시간이
저편으로 넘어가는 일
담장 위 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잠시 발을 뗄 수 없고
얼어붙은 말들이 해동되지 않는다
약속은 어느 시간에 다른 얼굴이 된다
말을 잃어버린 사이에는
없는 시간만 남는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의 시에서는 시적 자아와 타자가 서정적 동일화에 이르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동일화의 대상은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한 부재의 상황에 있거나 불화, 불통의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위 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시적 자아와 '당신'은 소통의 매개라 할 수 있는 둘 사이의 '말'을 잃는다. '한 말'은 당신에게 가닿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말'이 되어 쌓이고만 있다. 이 시에서 소통의 단절은 "관계를 잃는다"는 의미이며 "관계를 잃는다는 것은 시간이/ 저편으로 넘어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시간을 공유하는 일이다. 이 시간이 '함께 있는'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는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직 당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만들고 소통하는 둘만의 고유한 시간일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마음, 사랑 같은 것들이다. "얼어붙은 말들"이나 '다른 얼굴이 되어버린 약속'이란 바로 이러한 정서들이 변질되거나 사라진 상태를 의미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잃어버린 사이"에는 우리만의 고유한 시간이 아닌 '우리가 없는' 물리적 시간만 남게 되는 것이다. (p. 시 62-63/ 론 113-114) <박진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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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나는 잘 있습니다』에서/ 2024. 1. 15. <문학의전당> 펴냄
* 정리움/ 경남 거제 출생, 2020년 『시에』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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