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메모리얼 가든 외 1편/ 백연숙

검지 정숙자 2024. 1. 24. 01:21

 

    메모리얼 가든 외 1편

 

     백연숙

 

 

  아파트 화단을 지날 때였다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이리저리 갖다 대며

  맥문동을 찍느라 여념 없다

 

  아니, 벌써 그 나이에

  꽃이 예쁘다는 걸 알다니!

 

  저 나이 때 나는

  기차 사고로 입원 중이었고 오랫동안 재활치료를 받았지

  죽은 피를 한 사발씩 뽑고 나서 창문을 내다봤을 때

  병원 화단에 피어 있던 꽃

  그때는 저 꽃이 맥문동인 줄 몰랐다

  기차가 달릴 때마다 꽃은 궤도를 이탈한 별똥별처럼 빛났다

 

  타는 듯한 폭염이든 폭우든

  아무렴, 잘 자라는 맥문동이 맥문동인 걸 이제 잘 알지만

  정작 저 보랏빛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는데

 

  꽃은 멍에서 오고

  멍은 뿌리로부터 온다

 

  꽃은 잘 보이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멍의 뿌리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꽃이 예쁘다는 걸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알았다

     -전문(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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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

 

 

  물들까 봐 근처도 가지 않았다며

  쥐똥나무 창공이라며 친구라며

  졸지도 않았다며

  꽃은 피었지만 나비는 날지 않았다며

  사각지대는 아니었다며

  새가 노래로 울었다며

  58년 개띠 열댓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며

  게이는 아니지만 스타킹이 나왔다며

  뒤로 갈 수도 없었다며 대포통장이었다며

  아이와 노모가 타고 있었다며

  하필이면 블랙박스가 꺼져 있었다며

  애인이라며

  월요일은 일산 수요일은 목동

  토요일은 우리 동네 약수터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자

  운 좋게 발을 뺐다며 물까지 타진 않았다며

  고향 가는 길이었다며

     -전문(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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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에서/ 2024. 1. 2. <파란> 펴냄

  * 백연숙/ 충남 보령 출생, 1996년 『문학사상』으로 시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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