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0회 시예술아카데미상 수상작>으로 선정됨
꽃으로 보니 꽃
강빛나
할머니 대신 열네 살에 물질을 갔을 때
한순간 태왁이 꽃으로 보인 적 있다
바다 잎사귀 위에 말갛게 피어 나 여기 있다는 듯
자맥질할 때마다 들썩이는 꽃의 엉덩이
파도가 시퍼렇게 허리를 밀어내면 꽃은 하염없이 수면으로 솟아올랐지만
할머니는 물밑의 바람을 따라가라고 몸속에 들어와 말했다
겁 없이 내리꽂히는 삼세기 살빛, 물계단을 건너 바다 한 귀퉁이를 퍼 올릴 때마다 꽃은 시들지 않으려고 몸을 흔들었다 설움은 절여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뒤집어볼 수 있는 생이 아니었다
수평선을 허리에 감고 고요하게 누워 세상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바다의 깊이가 겨우 한 뼘쯤으로 느껴질 때까지
해변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하얗게 늙을 때까지
아가, 꽃이 흔들리면 잠시 쉬거라 할머니의 밭은 목소리가 죽지 않고 꽃이 되어 걸어가고 있었다
몸속에 기록해 놓은 일기예보와 찬밥 한 덩이와 숨을 붙든 봄 바닷속
꽃들은 끝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전문(p. 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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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동인 『미루』(1호_신작시)에서/ 2023. 11. 11. <상상인> 펴냄
* 강빛나/ 2017년『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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