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쪽/ 황지형

검지 정숙자 2023. 10. 10. 01:33

 

    쪽

 

    황지형

 

 

  파의 항복을 찾느라 책갈피를 뒤적였네 쪽을 넘길수록 바깥에 파를 숨겨 놓았네 샘솟는 눈물이 대파 때문이라면 작은 파의 하얀 면 앞에 나는 무릎을 꿇어야 했네 마음에 담을 에피소드가 황폐해졌거나 말거나 대파가 숭배하는 작은 면을 도려내어야 하네 한 페이지 분량의 쪽과 파를 따로 오려 내 명사형을 덧칠해 놓기도 했네 바람과 햇빛에 견줄 수 있는 파 씨를 오래도록 쟁여 두고 싶었네 몇 겁의 생이 하얀 파꽃에 앉아 팔랑거렸네 파의 일부에 불과한 쪽의 분량을 넣어야 할 순간이네 얻고자 하면 동사가 되어 굴러떨어져야 했네 도마에 다져진 파를 문단에 넣어야 하네 잘 아는 거라고 검은 후추를 흩뿌리고 있네 저 높은 곳은 대파야, 그 아래는 잎사귀가 마르는 9월이 오고 있네 맹목과 오인을 베어 먹는 향신료라니 씨를 받느라 두 손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네 나는 검은 씨를 취함으로써 현기증과 허구까지 대등한 쪽과 파를 과시하고 있네

    -전문(p.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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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목문학회 사화집 『즐거운 곡선에서 배회 중』에서/ 2023. 8. 10. <파란> 펴냄 

  * 황지형/ 2004년 『시와 비평』 & 2009년 『시에』로 등단, 시집『사이시옷은 그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