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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연 시평집 『시조의 향연』/ 사랑 : 유종인

사랑     유종인    길 잃은 아이 하나가 저만치 울고 있기에   그늘 속에 섰던 눈사람   햇빛 속에 걸어 나가선   괜찮다,   울지 말거라   녹는 몸으로   달랜다   -전문(51-52)   ◈ 괜찮다, 울지 말거라/ 녹는 몸으로 달랜다(발췌)_김일연/ 시인     비극은 언제나 곁에 있지만 "그늘 속에 섰던 눈사람"이 계셨기에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햇빛은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고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런 처지를 슬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제가 당신의 예술이며 인생이며 삶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늘 속에 서 있던 사람. "햇빛 속에 걸어 나가선/ 괜찮다,/ 울지 말거라" 달래줄 때 정작 그의 몸은 그때마..

숨/ 진란

中     숨     진란    미운 사람 없기, 지나치게 그리운 것도  없기, 너무 오래 서운해하지 말기, 내 잣대로 타인을 재지 말기, 흑백논리로 선을 그어놓지 말기, 게으름 피우지 말고 걷기, 사람에 대하여 넘치지 말기, 내 것이 아닌 걸 바라지 말기, 얼굴에 검정색깔 올려놓지 말기, 미움의 가시랭이 뽑아서 부숴버리기, 그냥 예뻐하고 좋아해 주고 사랑하기, 한없이 착하고 순해지기   바람과 햇볕이 좋은 날 자주 걸을 것  마른 꽃에 슬어 논 햇살의 냄새를 맡을 것  그립다고 혼자 돌아서 울지는 말 것  삽상한 바람 일렁일 때 누군가에게 풍경 하나 보내줄 것  잘 있다고 카톡 몇 줄 보낼 것  늦은 비에 홀로 젖지 말 것  적막의 깃을 세우고 오래 걸을 것    -전문(p. 145)/ 수상시집 『슬픈..

별의 방향을 읽다/ 이현서

中     별의 방향을 읽다     이현서    검푸른 밤하늘, 모래를 뿌린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꿈이었다 선명한  푸른 별빛이 발아래로 쏟아졌다   빠르게 이동하는 별자리들  음계를 버린 지 오래인 나의 노래가 더듬거리며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던 전생을 빌려와  별의 방향을 읽고 있다   어떤 영혼의 간절함이 별을 낳았을까  별 속에도 바람이 살고 있을까  눈먼 새가 울고 있을까   내 안의 습지에서  천 년의 시간을 만지작거리던 바람이 피워내던  구름 꽃의 비밀이 풀릴 것만 같은 머나먼 행성   역류하는 꿈속  당신이 두고 간 계절 사이  붉은 패랭이꽃 속으로 들어간 빼곡한 울음들이  가까스로 파란 정맥을 타고 흐른다   일억 광년의 거리만큼 아득한 존재와 부재의 거리에서  부르면 목이 메이는 ..

복권명당/ 김자희

복권명당      김자희    잠실역 8번 출구  꼬리가 보이지 않는 줄 서기   민망한 시선은 서로를 외면한다  지남철에 나사못 달라붙듯 날마다 자라나는 대열  지친 얼굴 얼굴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스며드는 한기에 온몸이 떨려온다  머플러로 목을 감싼다   샛강의 모래톱 같은 이방지대 롯데캐슬 앞  저물어 가는 겨울비에 떨면서 그들은 무표정하게 서있다   오천 원 만 원권의 지폐들이 누군가의 입에 블랙홀같이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을 알면서 언젠가는 자신들의 입에도 블랙홀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오늘도 고독한 줄 서기를 하고 있다   123층 타워는 비밀의 성처럼 견고한 벽들로 최소한의 출구만 내어놓고 침묵한다   세상이 아파가고 있다   줄 서기 유혹에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버..

보인다, 저만큼/ 김은

보인다, 저만큼     김은    낡은 문이 삐그덕거린다   노인 수도자를 엿본다   침묵으로 곡기를 채운 모습들  허기진 몰골 퀴퀴한 냄새  녹슨 쇠사슬의 껍질 같은 모습이다   밤을 멀리 쫓아버린  시간 속  말라버린  기억의 거죽처럼   그들은 고뇌의 알맹이로 퍼즐을 맞추고 있다     -전문(p. 96)  --------------------- * 『미네르바』 2024-봄(93)호  Ⅱ> 에서 * 김은/ 2018년 『미래시학』으로 등단, 시집『불면을 드로잉하다』

매화를 그리다 1/ 문영하

매화를 그리다 1     문영하    아버지는 새해 첫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5세, 2002년의 화두; '올해는 버리는 해'  "기쁨도 슬픔도 다 버리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응시한다"   아버지, 서울로 향한다는 연락이다. 한사코 큰 병원을 거절하시더니  이제 때가 되어 자식 곁에서 문을 닫겠다고 결심한 모양.  "일흔다섯이 넘으면 여럿에게 폐를 끼친다." 늘 말씀하시더니  일흔다섯 5월, 영면에 드셨다   마당에 있던 매화가 가지를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전등불을 켜 놓고 책상 앞에서 꽃 피우기에 골똘하셨다.  새벽 내내 꽃의 향기를 모으던  아버지 다정한 꽃으로 원고지에 촘촘히 앉으시더니   내 몸 어딘가 숨었다가  해마다 봄이면 환한 꽃으로 건너오신다    -전문(p. 90..

5월/ 강송숙

5월     강송숙    노모는 꿈자리가 복잡하면 전화를 하신다  조심하라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으로 이미  심란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원주발 먹구름이 통째로 몰려오겠군   마당에서 놀던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아침부터  시원치 않다 저런 모양새면 동물병원에 데려가도  별 방법이 없다 늘어진 고양이를 담요에 말아 놓고  나는 일을 보러 간다  두 달도 살지 못한 고양이가 혼자 죽어가는 동안  사람을 만나고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다   반나절 만에 돌아와 나는 상황을 수습하고  남은 고양이와 어미는 죽은 참새를 가지고 논다  저 빠른 망각이 부럽다   그날 밤 멀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꿈을 꾸었는데  혹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까  크게 서운하지 않았다     -전문(p. 84)   ---------..

김정자_시인은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발췌)/ 균열(龜裂) : 김민부

균열龜裂     김민부(1941-1972, 31세)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배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 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피 묻은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   바람 불어··· 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의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이 세상에 남겨질 말씀인가    -전문-   ▶ 시인은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고뇌와 마주서야 한다(발췌)_김정자/ 시인 · 문학평론  이 작품은 시인의 나이 17세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다. 우리는 16세 때 라틴어 시로 일등상을 타게 된 ..

시간의 그림자 외 1편/ 이성혜

시간의 그림자 외 1편      이성혜    몇 달째 둘이 듣던 강좌를 혼자 듣는 날, 허전한 여유로움이  역사박물관 뒤뜰을 거닐게 한다   새문안 길, 건물 한 겹의 뒤란엔 잔디와 작은 가지식물과 꽃나무들이 내뿜는 녹색 호흡이 조밀하다   흐름 밖의 흐름을 느리게 마시며 걷는데 작은 소란이 인다   새다, 박새 한 마리가 제 다리만큼 가는 가지에 얹혀 크고 작은 포물선을 만들며 무게중심을 찾아가고 있다   뿌리까지 뒤흔드는 소요를 견뎌주는 가지  잠시 후 서로의 접점을 찾은 새와 가지가 고요하다   다시 발걸음을 떼다 숨이 멎는다   언제부터인지 피사체를 주시한 채 카메라가 되어버린 그의   렌즈 안으로 고요가 흘러들어간다   그와 카메라와 새와 가지가 통합되었다, 시간의 한 공간에서!   셔터 소리의..

신을 잃어버렸어요+해설/ 이성혜

신을 잃어버렸어요      이성혜    이유 모를 총질과 아비규환에서 도망쳤는데요 맨발이네요 무한 앞에 방향 잃고 여기  저기 신을 찾아 헤매요 신이 신을 낳고 낳아 내가 바로 그 신이라 나서는 신 많은데 신이 없네요 조악한 모양 싸구려 재질 엉성한 바느질 가짜  모조  짝퉁, 내가 찾는 신은 디자인 재질 바느질이 최상급,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유일한 신! 이라니까요 상하지도 더럽혀지지도 않는 발 때문에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신을 찾아 헤매요 왈패들 왈짜를 막아주는 주막집 주모 추락하려는 절벽에서 손을 내미는 청동 활 남자 토기에 물을 떠주는 여자, 원치 않는 구원들이 신 찾기를 끝낼 수 없게 하네요 때로는 강풍에 돛단배처럼 휘리릭 대서양으로 나아가고요 때로는 잠자는 지중해 시간에 묶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