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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정숙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정숙자    가을은 사유를 자유롭게 합니다. 지친 영혼을 충전시켜 줍니다. 길 떠나는 철새들에게 손수건 흔들어 보이는 억새  꽃 언덕. 더 총총 더 맑게 떠오른 별들을 보노라면 제 삶에 얹힌 돌도 얼룩을 잊어버립니다. 아아 그러나 가을은 멈출 수 없는 외로움을 몰아옵니다. 마음이 맑아진다는 것 자체ᄀᆞ 외로움>이ᄅᆞᆫ 병환의 시초입니다. (1990.10.13.)                책이 우는 걸 보았습니다  사람이 울어도 차마 못 볼 일인데,   책이 울다니,  책이…,   삼십여 년 한곳에 세워두었던 책을 이사 와서 다시 가나다순으로 장서했거든요. 앗 그런데 표지 날개에 끼워진 첫 장을 어느 책에서 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날개 속에 여유분의 틈이 없어서..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삼십 대의 가로수 길 외 1편      한명희    담요처럼 쓸쓸함을 덮어쓰고 땡볕의 가로수 길을 걸었다   땡볕도 가로수 잎도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사실은 손발이 시린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몸이 안 좋은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땡볕의 가로수 길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에서 멀어질수록 외로움이 가까워졌다   외로움은 기체여서 속속들이 스몄다   외로움은 액체여서 계속 번져나갔다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걸을 힘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라 해도   그것만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영영 ..

대유목 시대/ 한명희

대유목 시대      한명희    나의 땅이 아니니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의 대통령이 아니니  투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한다지만  나의 신이 아니기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국경 근처가 의외로  경비가 허술합니다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방향을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유목민이고요   그들을 따라  핸드폰과 노트북을 챙깁니다   어디까지든 가볼 참입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에서 제목인 "대유목 시대"는 '디지털 노마드'를 지칭하고 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사이버 세계에서는 국가가 지배하는 영토도 없고 신을 모셔야 할 사원도 없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넘어 자유로운 세계를 항해한다. 시인이 "투표하지 않"고 "사원이 있는 동네에서는/..

유성호_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부분)/ 꽃은 지고 : 박재두

꽃은 지고      박재두(1936-2004, 68세)    아홉 겹 성곽을 열고 열두 대문 빗장을 따고  바람같이 질러온 맨 마지막 섬돌 앞  뼈끝을 저미는 바람, 추워라, 봄도 추워라   용마루 기왓골을 타고 내리던 호령 소리  대들보 쩌렁쩌렁 흔들던 기침 소리  한 왕조 저문 산그늘 무릎까지 묻힌다.   다시, 눈을 닦고 보아라. 보이는가  칼 놀음. 번개 치던 칼 놀음에 흩어진 깃발  발길에 와서 걸리는 어지러운 뻐꾸기 울음.      -전문(1981년)   ▶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 사량도의 시인(부분)_유성호/ 문학평론가      전남 통영의 사량도 능양마을에는 「별이 있어서」라는 작품이 새겨진 박재두 시비가 서 있다. 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의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

광야/ 김남조

광야     김남조(1927-2023, 96세)    오늘 이미 저물녘이니  나의 삶 지극민망하다  시를 이루고저 했으되  뜻과 말이 한 가지로 남루이었을 뿐  생각느니 너무 오래  광야에 가보지 못하였다   그곳은 키 큰 바람들이  세월없이 기다려 있다가  함께 말없이 오래오래  지평을 바라보아 주는 곳  그러자니 어른이 좀 되어 돌아오는 곳   삶의 가열한 반의 얼굴,  혼이 굴종당하려 하면  생명을 내던지고 일어설 계율을  이 시대 동서남북  어느 스승이 일깨워 주는가  어느덧 나는 사랑을 말하지도 않고  번뇌하는 두통과도 헤어져    반수면의 수렁에서  안일 나태한 나날이다가  절대의 절대적 위급이라는  음습한 독백에 부대끼노니    필연 광야에 가야겠다  그곳에서 키 큰 바람들과  말없이 오래오..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달리는 소리에 계곡은 늘 깨어있고  앉기 편한 돌을 골라 발 담근 내가  소리 내며 달리는 투명한 물살을 들여다본다   불룩하거나 움푹 파이는 물의 굴곡은  정교한 사슬의 톱니들 같다   무수한 초침들로 분주한 도시의 하루  되돌릴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소스라치듯 욕망의 트랙을 달려간 바퀴들은  모두 어디에 가있을까   서늘한 그늘 좇아 자리를 바꾸는 내가  초침에서 분침으로 느슨해진다  나무처럼 하늘 향해 귀를 세우고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지금  비로소 시간 밖으로 나온 것 같다   떨어진 잎이 뜬구름 위를 천천히 맴돈다  달려간 이들이 닿은 피안이 저곳 같아서  이쪽과 저쪽의 거리를 가늠하는 동안   미늘에 물려 기울어지는..

이름 名/ 노혜봉

이름 名      노혜봉    캄캄할수록 가득 차 하늘꽃이라 불러본다  아버지 얼굴 흐릿해 불화살 맞은 해바라기꽃이라 부른다  멍들어 가슴에 새긴 혈흔, 도장꽃이라 써 본다   나 죽으면 불러줄 이 없는 그 이름 실컷 불러본다  하루아침 훌쩍 지구의 회전문이 열려져, 그 옛날  우주로 출타하신 이후, 아무도 아버지 성함  써 드린 일 없는 노용석盧龍錫, 그 이름,   문갑 서랍을 열고 상자 속에 고이 모셔 둔  아버지 상아도장을 꺼내, 오랜만에 문질러 본다  싸늘한 돋을새김에 소름 살아 오르듯 촉촉한 체온  시집와서 생신날 제삿날 까맣게 잊고 못 챙겨 드린 일  밀린 참회록 내리 써 놓으면 꽃도장으로 지워 주실까   곤히 잠들어 있는 어머니 눅눅한 그늘 곁  가족관계증명서에 아버지 검지손톱 담뱃진 맡듯이..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궁금하다  돌을 건져 올려 어떻게 미역을 만드는지  푸른 물결을 어찌 통째로 치마폭에 담아올 수 있었는지  오늘 무슨 날이기에  남해바다가 가지미와 조개를 앞세우고  아침부터 뜨겁게 이곳에 들렀는지  단돈 오천 원에 돌미역국이 다 나오는지   영미야, 생일 축하해     -전문(p. 58)  ---------------------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비둘기 경제학』등

변신/ 박판식

변신     박판식    내일 내 꿈은 핑크입니다  꿈도 가끔은 색깔이 필요하다는 게 놀랍습니다   핑크가 그렇게 다양한 줄 몰랐습니다  고흐의 핑크, 뭉크의 핑크, 마네의 핑크, 샤넬의 핑크  셜리의 핑크······  면접관의 서류철 속에서 꿈은 비닐 포장이 되어 하나씩 번호를 부여받고  보살은 불가해를 손에 넣습니다   보살은 온몸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183센티미터의 잘생긴 보살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중생을 찾고 있습니다   생각은 전화처럼 옵니다, 받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매 시각 분초 단위로 알람이 울립니다   훌륭한 생각에도 매너리즘은 있습니다  꿈속에서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생을 낭비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서도 자신이 고객이라고 착각하는 중생은 있..

목련 정원/ 곽효환

목련 정원      곽효환    내 앞에 있으나 등 들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하늘 아래 가장 먼 거리를 봅니다   붉게 빛나면서 점점 어둠에 잠기는 봄날 저녁  어두울수록 환하게 빛나는 목련꽃 그늘에  내 얼굴은 잠겨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고 깊은 심연   먼 곳을 바라보는 그 사람은  저 너머와 이곳을 잇는 열쇠 구멍인데  아람어를 모르는 나는  꽃그늘 아래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몸을 돌려 손 내밀면  내 마음은 요동치며  피고 지고 피고 지는 꽃들의 정원이 되고  뇌우가 쏟아지는 평원이 되었다가  낙엽 지고 눈 쌓인 설원이 될 터인데   어느새 꽃잎을 다 떨군 목련 정원에서  먼 곳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목련 한 그루를  나는 마냥 바라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