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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고구마가 주식이었던  내 유년의 겨울은 참 길었다  눈도 많이 내렸으며  처마 밑 고드름은  땅까지 길게 늘어졌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은  겨울이 하루처럼 지나간다  눈도 내렸다 금방 녹아내리고  처마 밑 고드름은 보이지 않는다   해진 옷과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고  눈 내린 조그만 골목길을  검정 고무신으로 내달리던 날들도   호호 언 손을 입에 불다가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기도 하고  처마 밑 고드름 뚝 따내어  입에 넣고 쪽쪽 빨기도 했던 그날들은  이제 없다 그 찬란했던 겨울은   겨울은 겨울답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는데   이제 그 겨울도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이제는 떠나고 없다   서산에 긴 그림자만 장승 되어 서 있을 뿐이다    -전문(..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교실 창가에 기대어 흰 운동장 너머  바라보면 남해바다 한쪽이 정답다  바다가 있는 교실 풍경  몇 걸음 내달리면 닿을 아름다운 거리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나는 꿈의 바다 대신  상춧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 되었다  들판에 들꽃 지천인 봄날 때 씻긴다고  우루루 줄지어 아이들 냇가로 몰고  지루해진 오후, 냉이꽃과 싸리나무와 종달새  그리려 자주 언덕에 올랐다   뽀뽀한다고 달겨들던 코찔찔이 1학년 철이랑  가난해도 의젓했던 화전민 반장 준이는  너른 세상바다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다시  씀바귀 잎 같은 선생 노릇이나 해 볼까  이층 바다 교실 창가에서, 우두망찰  바다를 ..

홍용희_민중 변혁 운동의 전통과 우주 생명의 지평(부분)/ 황톳길 : 김지하

황톳길      김지하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

초파일 밤/ 김지하

초파일 밤      김지하(1941-2022, 81세)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 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국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이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끈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

문상/ 이재무

문상         김지하 선생님에게     이재무    오월은 연초록 광휘로 번뜩이고  내 마음은 회색빛 우울로 가득하다  야생마처럼 질주하다가  사자처럼 울부짖다가  기운 다해 쓰러져  과거가 된 사람을,  저항에서 생명으로  전환한 시와 사상 때문에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한국의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대의 불운한 사상가를,  이제는 생전에 그가 남긴 음성과 글을 통해 만나야 하리  바다는 벼랑에 부딪혀 깨어지는  물의 파편에 대하여 아무런 감정이 없다  실재 속 한 개체일 뿐인 인간은  누구도 주어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맨몸에 걸치는 비단조차  아플 것처럼 눈부신 햇살이 불편하다  오는 길 혼자였듯  가는 길 혼자인 이를  배웅하러 문상 간다     -전문(p. 36-37)   ---..

유목의 시간/ 최도선

유목의 시간      최도선    정오에 붉은 사막을 걷는 낙타들,  바람에 몰려다니는 모래가  각을 이루거나 언덕을 이루거나  대양을 향해 출항하는 배처럼  묵묵히 걸으며 자연에 대항하지 않는다   모래바다는 적색거성의 성채 활활 타오르고  소소초를 씹으며 태양을 향해 침 흘리며  이정표 없는 길을 가는 낙타들  제 그림자 칼날 능선 위에 남긴다   미라가 된 나무 곁에 서서  뒤처져 오는 낙타를 보며  어릴 적 달리기할 때 늘 뒤처지던 내 모습 떠올리며  마음 한 조각 모래 속에 묻는다  그곳엔 내 영혼도 들끓었던 옛날이 있었나 보다   붉은 사막  그 위에 파란 하늘  어둠과 함께 추워진 밤  태고 같은  고요   낙타는 가던 길 멈추지 않는다    -전문(p. 34-35)    * 블로그 주: 위..

우리 집이니까 외 1편/ 백성일

우리 집이니까 외 1편      백성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이상해요  여기는 전부 한국사람뿐이고  모두들 우리말만 해요  그런데요 그냥 좋아요   초등학교 1학년 마치고  주재원으로 온 가족이 독일 가서  이제, 6학년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손녀가 공항에서  도착과 동시에 온 전화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는 나라들 생각할 때  우리나라는 천국이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는 나라  그럼 좋을 수밖에.     -전문(p. 37)       ----------------------     빼앗긴 날들    계절을 잊은 하루들  안갯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벽 아닌 벽에 막혀 버린 길  스쳐가는 바람이 세상을 조롱하고  흐르는 공허한 마음과  막연한 다짐이,  지난 계절..

잔디/ 백성일

잔디     백성일    살다가 보니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인다  얼굴에 윤기가 나고 좀 살만하면  누군가 사정없이 허리 부러뜨린다  수없이 당하고 원망과 불평도 했지만  하늘에 주먹질이다  죽은 듯이 참고 삭이고  사나흘 지나면 허리 틍증도 사라진다  어제를 잊어버리고,  서로 끌어안고 몸과 마음도 하나로  얽히고설키고 사랑하면서 하늘 본다  전설의 가훈은  절대로 하늘로 머리 쳐들지 마라  그저 핏줄끼리 서로 한 몸 되어  땅만 보고 살아라 하셨다  땅에 엎드려 죽은 듯이 숨죽이고  오늘도 무르팍 까지도록 기어간다  그래도 땅은 넓다     -전문-   시인의 말> 전문: 게으른 놈이 게으른 놈을 보고/ 참으로 게으르구나 하고 나무란다.// 우여곡절 끝에 6년 만에 3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

도라산 역/ 최금녀

도라산 역      최금녀    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밭 사이로 마중을 나오는 팻말, 파주 도라산 역······   도라산 역은 내 마음속 맞춤 가락  '돌아가는 고향역'의 은어   들꽃이 필 때, 흰 눈이 날릴 때, 망향제단에 절 올리고  렌즈의 각도를 맞추고, 그 너머를 보고  기적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정거장 지나면 함흥이고  한 정거장 지나면······ 고흥이고, 사리원이고, 북청이다  귀가 닳았다  애가 닳았다   세상 모르게 잠이 든  도라산 기차역을 지날 때마다  나 당장이라도  운전석을 차고 앉아  북녘으로 머리를 돌려  200, 300킬로로 냅다 달려가고 싶다  천 만의 한숨으로 낡아가는  저 팻말들 하나하나 껴안고  울고 싶은  자유로야!  파주야!  도라산 역아!  ..

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자결한 꽃 외 1편      강미정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을 보러 갔다   꽃나무는 눈을 내리감고 제 발등에 펼쳐진 고요를 보고 있었다   한 걸음 꽃그늘을 디딜 때마다 붉은 고요가 피었다가 사그라졌다   꽃을 밟고는 못 건너가겠다고 딸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꽃송이를 하나하나 주워 올렸다    꽃을 올린 두 손바닥은 오므린 꽃잎이 막 벌어지는 꽃 한 송이   꽃향기가 손금을 따라 붉게 번지고 고이고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나의 시간이 고요 속에 앉고   바닥도 없이 층층이 바닥이었던 나의 붉은 시간도 앉아  웃음도 뎅컹, 울음도 뎅컹, 스스로 목을 베고 자결한 꽃송이를 주워 들었다   눈부신 바닥의 암흑만을 딸에게 주게 될까 봐 나는 두려운데    밟을 수 없는 꽃송이 하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