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85

Book-풍/ 정숙자

Book 풍 정숙자 그저 놔두면 무생물 펼치면 벽과 벽 넘어온 나비 편 채로 엎어놓으면 팔작지붕, 또는 눈 동근 어미 새의 지극한 날개 그 안쪽 활자들은 한서寒暑에도 끄떡없을뿐더러 어떤 비수, 강풍에도 휠 리 없는 혼이라 하네 돌아 나온 길이거나 막다른 골목에서도 사원이며 첨탑이며 등불이 될 뿐 나는 그, 벗을 오래 믿었고 나는 그, 분을 오래 기댔고 나는 그, 신을 오래 섬겼지 내 길은 오롯이 그, 분이 닦아주신 거라네 나는 오로지 그 분을 사랑했네 품고 자고 끼고 걷고 한없이 아끼며 까마득히 우러른다네 그, 문에 이르면 눈물이 타네 이 비탈에 어찌 그런 분들 살았나 하고 이 진토에 어찌 이런 책들 남았나 하고 -『문학과창작』2019-가을호 --------------- * 시집 『공검 & 굴원』(4부/..

水- 밀도/ 정숙자

水 밀도 정숙자 물은 물로써 빈틈없는 공기다 새들의 발놀림 물고기의 유영에 따라 흔들리며~ 흔들리며~ 밀려나간다 더 이상 밀릴 곳 없는 가장자리, 그 절벽에 부딪히면 일월 아래 가장 낮은 말 물결이 된다 햇빛 머금은 순간 새파란 별로 솟을지라도 하 세월 거슬러 다시금 물속의 물로 고요해진다 우리가 걷는 사이 말하는 사이 나뭇가지 흔들리는 사이 텅 빔으로 꽉 찬 지상의 공기 또한 그렇게 흔들리며~ 흔들리며~ 어디론가 끝없이 번질 것이다 물리고 찢기고 어긋나며 조용~ 조용히~ 허 허 공중에 주름지다가 어느 외계, 떠돌이행성을 찍고 초원의 첫 번째 말 미풍으로 되돌아온다 물결 한 점, 바람 한 그루, 말 한마디 기포 없이 밀리고 겹쳐 전장보다 더한 파장 출렁거리는 생존은 만경창파 일파만파 쥐 잡는 바다, 꽂히..

제32회 동국문학상 수상_정숙자(시) '공검' 외 2편/ 심사평/ 수상소감

공검空劍* 외 2편 정숙자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 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을 뺴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 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 …일까요?) 공..

전해수_ 기호의 서식들(전문) ; 시사사 포커스_ 정숙자/ 작품론

기호의 서식들 전해수/ 문학평론가 정숙자 시인은 2017년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을 발간한 후 시적 행보가 또렷해지고 있다. 시적 행보가 ‘또렷하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시작詩作 행위에 대해 일정부분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향방을 이미 결정해두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찬 평론가가 시집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순도 높은 정념”과 “웅숭깊은 존재론적 광휘”가 이번 신작시에서도 빛을 발한다. 정숙자의 시세계는 “실존적 성찰과 초월적 열망”으로 존재存在의 표상表象에 다가가려는 철학적 사유를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보다 한층 더 과감해진 최근 발표 시의 시적 표현에 시선이 멈추는 것은 다만 ‘실존적 성찰’ 때문만은 아니..

피어, 서(書)/ 정숙자

피어, 書 정숙자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또 엄나무 그렇게 심어야겠네 홀로이 헤테로토피아에 머 물 러 외로이 외로이 그리고 또 서늘히 피 語 …… - 『시사사』2019. 3-4월호 --------------------------------------- * 시집 『공검 & 굴원』(4부/ p. 101)에서/ 2022. 5. 16.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

김명철_생명; 슬픔으로부터 사랑에게(발췌)/ 죽은 생선의 눈 : 정숙자

죽은 생선의 눈 정숙자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 (차라리) 그런 마음. 꺼내면 안 돼. 왜냐고? 저 머나먼 경계 밖에서 그랬잖아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진정으로) 그런 바람 포개다가 여기 왔잖아 엄마-wormhole을 통해 왔잖아 갖고 싶었던 그 삶 지금이잖아. 여기가 거기잖아 죽어본 적 없으면서 겁 없이 '죽음 희망' 그런 거 품지 말자꾸나. 우리! 경험으로 죽는 건 괜찮지만 경험일 수 없는 죽음 속에서 오늘 이 순간 아주 잊은 채 다시 태어나고 싶을 거잖아? 이게 몇 번째 생일까 생각해봤니? 만약 말이야. 그 비밀이 열린다면, 우린 또 얼마나 큰 후회와 자책/가책에 시달릴까 생각해봤니? 접시에 누운 생선이 나를 바라보면서… 종을 초월한 자의 언어로 그런 말을 하더군 그로부터 난 생선의 눈을 먹지 ..

사유-재산/ 정숙자

사유 재산 정숙자 있(었)다 나에게도 근근이 쌓아올린 얼음 산 별조차 굳어버린 빙벽 아래 오로지 무릎에 충실했다 하늘 쪽으로, 하늘 속으로 추락을 거듭한 빙 산, 그것은 능히 자산이 될 만했다. 사유의 산/사유의 재산이 될 만했다. 세계가 아닌 내 신체 내 지형이 될 만했다. 분출되지 못한 슬픔 안쪽 위로받지 못한 어깨 근처 뭇 고뇌의 단초이자 증발의 위험도 안은 눈물의 왜상, 그것은 녹아내린 재였다. 떠도는 단백질을 발아시켜 꿈틀거리게 걷게 한 수분의 결정, 또는 겨울의 의미. 한 덩이 두 모서리 얼음들은 삶의 본질에 이르는 사다리이거나 징검다리이거나 다음으로→ 다음으로→ 다음으로→ 밀어붙이는 바퀴였다. 좀 오래 덜컹거렸지만 그건 매우 정교한 (신의) 프로젝트였다 어느 날 문득 얼음 행성을 여기 내던져..

정숙자_「북극형 인간」에 대한 시작노트 : 북극형 인내

시> 북극형 인간 정숙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죽음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 음향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푸름 곁/ 정숙자

푸름 곁 정숙자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햇살 개미 멧새들··· 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나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 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 『들소리문학』 2018-겨울호 ------------------------ * 시집 『공검 & 굴원』(2부/ p. 53)에서/ 2022. 5. 16.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

일차 초상화/ 정숙자

일차 초상화 정숙자 죽음은 생애를 새롭게 한다 돌아보게 하고 고쳐보게 하고 멈추어 바라보게 한다 그의 용모, 그의 말씨, 그의 사상 등 방치했던 구석까지를 뜯어보게 한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실제는 그의 사후 세계에서가 아니라 그의 무덤 밖 타인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자死者가 물리적인 신체를 갖추고 으앙~ 재탄생한다는 건 증명 불가능한 가설에 불과하다. 물리학이나 수학/기하학을 동원한다 해도, 죽은 자의 부활은 실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계산으로 풀어낼 수 있는 우주과학 이론도 아니다. 덤이나 에누리를 잔뜩 얹어주어도 타인 안에서, 그가 흰 날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를 굳이 따라가 보지 않아도, 그는 지옥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그랬었구나 그런데도 그랬었구나 저 두 마디는 칭찬일 수도 욕일 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