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85

폐곡선/ 정숙자

폐곡선 정숙자 부질없음에 감염되었다 부질없음이 스며들자 모든 일의 발단 전개 결말까지가 덫에 갇히고 말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던 바이러스 세균이 아무리 창궐할지라도 피할 수 있으려니 설령 괴질에 걸릴지라도 오래잖아 벗어날 수 있으려니 부질없음≒쓸모없음≒덧없음 이 ‘없음 증후군’은 정신의 문제니까 스스로의 의지로 치유 가능한 질환이니까 아무런들 쓰러지랴 믿어왔다 (아니, ‘부질없음’에 관한 한 근처에 얼씬거려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늦었다 벌써 폐부 깊숙이 병원체가 점령/주둔하고 있다 떵떵거리다 탕탕 을러메다 회유한다 “부질없어요. 쓸모없다니까요. 덧없는 것을요” 이 병마에 걸리기 직전까지가 푸른 삶이다 이제 이 페스트 수용해야 할까? 오히려 남은 햇빛 다 버리더라도 다시 역병에 걸릴지라도 새로운 과거..

잎들의 수화/ 정숙자

잎들의 수화 정숙자 바람 불어도 날갯짓 못한다면 그 나무는 이미 강을 건넌 것이다 깃털은 저장한다 미풍의 강풍의 태풍의 파동들 하늘 가득 밀어 올린다 광장에는 광장의 나무에게는 나무의 흐름이 있다. 서로 다른 눈금과 눈금 잣대와 잣대 촉수들이 충돌한다. 전복 확장 이접 몰락하는 사이 돌연 변이가 맺힌다. 순종의 시작이다. 저간의 궤적과 실시간의 커브가 가져오는 틈, 불편이라는 그 공간은 애매와 모호가 물결치는 곳 비둘기 너희들, 너희들 부모형제. 광장 어느 틈에서 오늘을 품어냈으랴. 서울은 바닥도 허공이란다. 조석이나 챙겨 잇느냐. 골목도 시퍼런 서슬. 어울려 뒤뚱거리고 후루룩 함께 날아오르는구나. 혹 천사가 내려오느냐? 슬픔! 종족이거니. 오래 전 돌려세운 길. 주경 야독했던 집. 갈피마다 구름까지 뿌..

오홍진_언어 너머의 사물과 만나는 시/ 퀴리온도 : 정숙자

중 일부 퀴리온도 정숙자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이리저리 배치하네. 죽음에 관한 미로도 가꾸어내네. 겹겹으로 죽음에 포위된 자는 죽음은커녕 삶에 대해서조차 한마디 못하고 마네. 이런 게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침묵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침묵이 급습― 덮쳐버리는 게 아닌가. 아무 색도 아닌 시간이 떠내려가네. 꽃 잃고 잎 지우는 바위 눈뜨고 말 묻고 외로 나앉아버리는 바위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을 땐 그도 죽음 세포를 사변적 논리적 미학적으로 성찰했었네. 그런데 불과 일 년 사이 피붙이 셋씩이나 뜨고 보면 열쇠 꾸러미 뚝 떨어진대도 무슨 언어를 꺼낼 수 있으리오. 이렇게까지 사라지는 건가, 기호네 파토스네 전위네 신경을 자극하던 그 모든 선들이 저렇게까지 사건지평선에 ..

공무도주가(公無渡酒歌)/ 정숙자

공무도주가公無渡酒歌 - 미망인 정숙자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나. ‘개그 콘서트’를 보는데 눈물이 나. ‘웃찾사’를 보는데도 눈물이 나. 슬프지도 않은데 막 눈물이 나. 주룩주룩 아무 생각도 안하는데 눈물이 나. 이 눈물이 뭔지 나도 몰라. 막을 수도 없고, 막고 싶지도 않고 그냥 눈을 뜨고 있는데 눈물이 나. 이러다 눈알이 쏟아져버리지 않을까 싶게 눈물이 나. 언제 멎을지 알 수도 없고, 언제 또 터질지 알 수도 없는 피눈물이 나. 남들은 복이 터졌다고 위로 전화 걸어오는데, 복 많은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정말 정숙자는 복 터졌다고 말하는데 웃으며 전화를 끊고 나면 눈물이 나. 복이란 터지면 안 되는 거였나 봐. 복이 터지면 눈물도 함께 터지는 거였던가 봐. 누구라도 복이 터지면 눈물 날 거..

자력선/ 정숙자

자력선 -미망인 정숙자 벽에 걸린 눈을 봤다. 지나쳤다. 우연히 또 그 눈을 봤다. 순간 멈췄다가 지나쳤다. 다시 그 눈이 눈에 띄었다. 돌아섰다가 돌아서서 그 눈을 눈여겨봤다. 그 눈도 내 눈을 눈여겨봤다. 조금 멈췄다가 지나쳤다. 그 눈이 내 눈을 불렀다. 돌아봤다가 돌아가 또 그 눈을 만났다. 그 눈이 물었다. 너는 뭐하는 눈이냐.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눈이라고 눈으로 말했다. 다만 볼 뿐이냐고 또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보고 싶은 걸 본다고 말했다. 보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안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눈이 그럼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더 안 보인다고 내가 말했다. 그 눈은 그럼 더 이상 안 묻겠으니 멋대로 하라고 말했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