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6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2 정숙자 당신의 아기인 줄도 모르고 저는 그들을 잡으며 놀았었군요. 투명한 날개와 가느다ᄅᆞᆫ 몇 마디의 몸을 미루어, 그이도 천사인 줄을 어느 날 문득 깨우쳤습니다. (1990.7.16.) _ 저 역시 그들, 잠자리만큼이나 허공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_ 저 얘기를 들려줬을 때 조카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이모, 잠자리한테는 날개를 모아 쥐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다 부서졌을 거예요. 잠자리 날개는 수평으로만 펼치도록 태어난 거잖아요? 그런데 완전히 뒤로 세워서 한 잎처럼 모아쥐었다는 건 참으로 가혹한 일이었어요. 그런데도 놓아주면 사뿐히 날아갔지요. 너무 무서워서, 너무나도 아팠지만 있는 힘을 다해 날아갔던 거예요. 그 후 그가 얼마나 더 살았을지, 어디서 어떻게 되었을지··..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3 정숙자 저녁놀 무렵은 저의 사랑하는 시간 중에도 가장 사ᄅᆞᆼ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저녁놀 지는 시간은 당신께 드리려고 항상 비워 둔답니다. (1990. 7. 16.) _ 저 순진한 문장과 날짜 앞에서 많은 생각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菊花 옆에서」(부분) _ 저 자신이 벌써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꽃”이 아닌가 하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누님 같은 꽃”이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요. 그건 분명 마음과 자세일 텐데, 제가 과연 남은 시간을 그렇게 피울 수 지울 수 있을까 하고요. 국화는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꽃도 아니고, 신부의 부케로도 쓰이지 않으며 영면에 든 이와 그 가족을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7 정숙자 홀로 숲속을 걷노라면 풀벌레 소리 가득ᄒᆞᆸ니다. 낙엽 썩는 향기와 버섯 냄새도 오롯이 당신께 전하고 싶어집니다. 별스럽지도 않은 싸리꽃이 찌르르 한 줄기 햇살을 덧칠합니다. (1990. 7. 24.) _ 한자리에 서 있어도 제 할 일 다 하는 나무 인내, 성장, 보람, 베풂··· 한자리에 서 있어도 제 할 일 다 하는 나무 서고에 서 있는 칸트 같은 나무 ------------------ * 『실천문학』 2022-여름(144)호 에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6 정숙자 보이지 않는 상자에 공경을 담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었습니다. 이 ᄉᆞᆼ자, 당신께 드리는 꿈을 꿀 때면 악마가 힘을 잃고 달아납니다. 저의 수호신은 저만이 아는 당신이기에, 제가 당신을 잊을 적에는 당신도 저를 잊고…, 잊고만 계시리라고….(1990. 7. 21.) _ 접때, 텅 빈 나룻배 한 잎 강가에 있었습니다 그 나룻배 안엔 붓 한 자루뿐 있었습니다 詩는 배 붓은 櫓 우리 셋은 그렇게 깎아지른 강 저어, 저어 오늘도 꾸려갑니다 ------------------ * 『실천문학』 2022-여름(144)호 에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 정숙자 어제 잃었던 것을 오늘 찾았습니다. 어제에 울지 아니하고 오늘의 기쁨을 울었습니다. (1990.7.2.) _ 전에 살던 아파트는 3층이지만 오래 자란 후박나무가 빗소리와 새소리까지도 들려줬습니다. 느닷없는 코로나-19의 여파로 그 집을 팔아, 애들을 보살피고, 저는 이곳으로 옮겨 앉았던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데요. 처음으로 비 오는 날이었습니다. 소나기가 막 쏟아지는데도 그 푸르디푸른 생기 발랄한 빗소리가, 단 한 줄도 들려오지도 느껴지지도 않지 뭡니까. (???) 여긴 12층 창밖엔 허공뿐이었습니다. 때때로 ᄒᆞᆷ께 울어주고, 천불이 나는 속 식혀주기도 했었는데, 이제 그 친구의 그리움까지를 혼자 울어야 합니다. 이사 올 때 빠뜨린 것, 놓고 온 것 깨우치는 게 이리..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 정숙자 빗물 고인 포도鋪道의 상처들이 행복스레 가로등 빛을 안고 있습니다. 슬픔으로 파인 마음이 당신의 사랑에 울 때와 같이…. 혹, 몇몇 별들이 내려온 건 아닐까요? 더 아픈 당신께옵서 발자국 물에도 웅덩이에도 더 푸른 별 보내지 않았을까요? (1990.6.27.) _ 그대로 저기 있군요. 의식이라는 마을을 일러 소우주라 해도 될까요? 그때는 알지 못했죠. 이제 찾은 하늘에선 젊은 슬픔도 만질 수 있고, 이렇게나 늙은 슬픔도 겹쳐 지우며, 멀리 더 멀리 밀어 보내는 또 다른 슬픔! 홀로라도 달ᄁᆞ지 건널 수 있죠. 여태 그걸 배웠죠. ------------------ * 『미래시학』 2022-여름(41)호 에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 정숙자 아침에 핀 채송화가 저녁에 집니다. 저는 그 어린이에게 ‘하루 꽃’이라 이름 하나 더 올려 줬습니다. (1990.6.22.) _ 어떤 이가 말하길, 현대에는 여러 갈래의 자본이 저마다의 아비투스(habitus)를 나타내준다고 합니다. 30여 년 가로질러 굴렁쇠 몰아온 제 얼굴엔 무엇이 주름졌을까, 손거울 바짝 비추었더니 감중련( _ )한 표정 하나가 숱한 언덕을 압축하고 있었습니다. 고향 집 흙 마당 디딤돌마다 에둘러 피었던 빨강 ᄈᆞᆯ강 채송화가 옛 노트에서 아직도 ᄈᆞᆯ강 빨강 나비와 섞여, 덮어만 두었던 슬픔이 제 하늘에서도 꽃피었습니다. ------------------ * 『미래시학』 2022-여름(41)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9 정숙자 고독도 풍금風琴이랍니다. 어떤 고뇌도 맑아질 수 있도록 많은 건반을 갖고 있지요. 어느 날의 풍랑이 깨운 비애는 하늘까지 적신답니다. 딩 동 댕 동 저는 오늘도 풍금 앞에 앉아서 오로지 마음을 ᄁᆞᆩ는답니다. (1990. 7. 25.) _ “우리는 한 점 티끌 위에 살고 있고 그 티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별의 주변을 돌며 또 그 별은 보잘것없는 어느 은하의 외진 귀퉁이에 틀어박혀 있음을 알게 됐다.”(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코스모스』, 2004, 사이언스북스, 46쪽) 기억 속의 저 한 구절을 찾기 위해 몇 시간을 소비했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한 셈이겠지요. 독서 노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 세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가 변신해버린 까닭에 그 과정까지를 더듬..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8 정숙자 포장도로는 대지에 풀린 비단이지요. 날 듯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 아래 노동을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비단 필 이어내느라 허리와 ᄄᆞᆷ을 바치고 있을 텐데, 먹고 입고 기거하는 삶의 모두가 남의 ᄄᆞᆷ 빌린 것인데, 이런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그 빚 다소나마 갚고 떠날 수 있을까요. (1990. 7. 25.) _ 조금만 기울어도 흘러버리는 물 그 흐름으로 만물을 살게 하는 물 수평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알려주는 물 그 물이 네 마음 안에 있다는 것 또한 일러주는 물 그리고, 그 물이 진짜 물이라는 물 물은 어떤 물이든 가ᄍᆞ가 없다고 말하는 물 그래서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물 -전문(p. 23) ♣ 시작노트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초..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11 정숙자 슬픈 추억은 숨어 있어도 좋으련만, 질투라도 하는 양 되돌아와 모처럼의 행복을 그르치고 맙니다. 하지만 목메어 젖어버린 이 꽃다발이 제게는 진짜 꽃ᄃᆞᄇᆞᆯ입니다. (1990.7.10.) _ 카를로 로벨리(이탈리아, 1956~)의 양자 얘기는 우리에게 하 많은 자유를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30여 년 전의 저 공간에서, 그 이전에서라도 저는 폭 고꾸라져 죽었던 건 아닐까요? 죽은 줄도 모르고 허청허청 걸어온 육체가 아닐까요? 웬일인지, 여기가 꼭 커다란 무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 말입니다. -------------- * 『문파 MUNPA』 2022-여름(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