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6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정숙자 잠 깬 나비가 언덕 위로 날아갑니다. 거미줄마다 이슬이 빛납니다. 바다는 새로운 오선지를 펼쳤습니다. ᄄᆞ로 예술이 필요치 아니합니다. 종이와 펜을 내려놓습니다. 저 또한 스스러울 것 하나 없는 바람이 됩니다. 오랜 소원 이루는 찬란ᄒᆞᆷ이여, 순수는 저의 궁극의 이상입니다. (1990. 9. 8.) _ 이 삼경 어찌해야 전해질까요? 벼루가 닳아진들 글이 될까요? 붓끝에 뭘 먹이면 꽃이 될까요? 밤은 자꾸자꾸 동으로 흘러 창문에 푸른 물 비쳐드는데 어떻게 갚아야 갚아질까요? 죽어서 갚아도 갚아질까요? 이 침묵 어찌해야 뜻이 될까요? -전문(p. 35-36) ----------------------------------- * 『예술가』 2023-봄(52)호 에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6 정숙자 감으면 뜨지 못하고 뜨면 감지 못합니다. 깬 뒤에 꿈으로 오시거나, 잠든 시간에 지나치지 마세요. 하나뿐인 제 영혼은 행여 어긋날ᄁᆞ 서성이오니. (1990. 9. 7.) _ (간절한) 뗏목을 타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2022. 12. 31-2:10. 번째 회답을 썼고, (삶이라는) 그 아찔한 뗏목 위에서 다시 또 한 해를 맞이합니다 갖가지 풍랑 견디고 겪으면서도 오로지 믿었던 건 책과 시詩와 미래였습니다 -전문(p. 59) ------------ * 半年刊誌 『한국시인』 2023-봄/여름(4)호 에서

싱글턴 가족

싱글턴* 가족 정숙자 냉장고 다탁 서랍들 옳은 쪽으로만 도는 선풍기. 노상 한세상 에두르는 세탁기. 촌음도 가꿔라 스승 버금 벽시계. 농부를 생각하라 겸손한 식탁. 지구 끝도 단숨에 집 전화와 손 전화. 펼치면 나비가 덮으면 섬이 되는 책. 수평수직 투명한 잉크와 펜들. 꺼 놔도 어물쩍 진화하는 컴퓨터. 거울 이불 액자들 빈병과 우산. 창문 밖 새 소리와 나무와 태양. 산책로의 동/정맥 바람 개미 매미와 거미. 오밀조밀 명멸하며 웃는 가게들.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네거리와 강. 커피도 각색하라 늘 젊은 TV. 그리고··· 그리고··· 깊은 하늘엔 더 먼 하늘로 흐르는 계단. -전문- * 싱글턴(singleton): 혼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독신’인 사람들은 혼자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0 정숙자 그리움은 사랑의 시작이며 진행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채워지면 봄의 대지와 같이 새로운 노래가 움트지요. 그러한 아침은 어디로부터 오며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보이지도 않는 영혼을 열고 어쩌면 그렇게 다가오시며 그렇게도 아득히 떠나가는 것일까요? (1990. 8. 29.) 몇십 년 사이 우리는 벌써 목을 잡힙니다 몸이란 그렇게 한때 반ᄍᆞᆨ이고 무너지는 실재이므로 자신은 비존재로 존재하는 걸까요? 그는 아무래도 굉장한 인간입니다 -전문(p. 131) -------------------- * 『표현表現』 2022-겨울(85)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6 정숙자 귀뚜라미야, 너는 날개로 울고 날개로 노래도 부른다지? 네 날개는 공후箜篌보다도 아름답구나. 친구네 풀밭 찾아갈 때도 날개가 널 데려다주잖니! 날 수만 있어도 아름다운데 피리까지 들어있다니! 이 가을에 네가 없다면 얼마나 ᄏᆞᆷᄏᆞᆷ했을까. 내 삼경, 네 곁에서 검정을 지우는구나. (1990. 8. 18.) 귀뚜리야, 귀뚜ᄅᆞ미야 난 어제 ‘눈물점의 협착’ 수술을 받았단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할 때 참아버릇한 탓으로 막혀버린 게 아닐까 수술받는 내내 뒤늦은 강둑 흔들렸단다 한 계절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너처럼 그래야 했을 것을 서른 ᄆᆞ흔 쉰을 넘어도 슬픔 앞에선 한낱 아이일 뿐이었는데, -전문(p. 44-45) -------------------- * 『가온..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1 정숙자 숲은 노래를 품었습니다. 스스럼없는 잎눈에만이 애달픈 노래 얹힌ᄃᆞ기에 풀이며 벌레며 응달이며···, 이런 이들의 오랜 얘기를 귀담으려 애쓴답니다. 천둥과 우박에도 자라는 숲은 달빛햇빛 이슬을 안고···, 맑고 따뜻하게, ᄆᆞᆰ고 따뜻하게···, 그 중심 한 틀 오로지 꿈꾼답니다. (1990. 8. 25.) 사뭇 슬플 때는 어떤 말을 써도 시ᄀᆞ 된다 하도 부대껴 이제 아프지도 않다 죽은 것인가 죽은 채 살아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짜로 죽은 뒤에도 이 모양 이대로 유지될 것인가 반쯤은 죽어있고 반쯤은 살ᄋᆞ있는 이대로? -전문(p. 110) ----------------- * 『사이펀』 2022-겨울(27)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2 정숙자 제가 높은 데서 떨어진다면 당신께선 살포시 받으시겠지요. 저 단풍나무 잎새 하ᄂᆞ와 포근히 펼친 잔디밭처럼. 제가 깊은 물에 ᄈᆞ지더라도 당신께선 무동을 태우시겠지요. 저 떨어진 꽃잎 하나와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제가 북풍에 몰릴라치면 당신께선 병풍을 둘러주시겠지요. 저 꽁꽁 언 풀씨 ᄒᆞ나와 가만가만 에워싸는 보슬비처럼. (1990.9.4.) 당신은 제가 살아온 의지입니다 당신은 제ᄀᆞ 살아갈 표상입니다 어떤 서릿발이든 귀먹고 눈감(았)겠습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서로 모르는 사이 너무 많이 살아버린 까닭입니다 치욕과 수모가 달가운 건 아니지만 당신의 영원을 위해서라면 그 독毒을 사양할 이유도 없습니다 모멸에 차이고 짓밟혀 어느 ᄂᆞᆯ 쓰러진다면 우..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4 정숙자 다시 가을입니다. 당신 생각을 하면 가슴 무너지는 ᄀᆞ을입니다. 어느 때라 무너지지 않을 가슴이겠습니까, 마는 가을엔 열 곱 스무 곱 무너집니다. 뭇 별 저마다 총명하고 바람은 어디론가 바삐 가는데 저만이 돌이 되었습니다. 우박이든 번개로든 이 몸에 부처 얼굴 새겨 주소서. 어쩌면 가을은 ᄀᆞ장 깊은 말씀이겠지요, 마는 그래서 더 파래지는 하늘이겠지요, 마는···. (1990. 9. 6.) 사뭇 슬플 땐 어떤 말을 써도 시가 됩니다 슬픔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ᄆᆞᆭ이 체험하는 기온 중 하나이지만, 그렇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ᄋᆞᆭ는 추위입니다 -전문(p. 70) ● 시인의 말 세월 저쪽의 미발표원고 한 묶음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을 뭐라 표현해야 하나? 야생이란 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3 정숙자 달 중에 제일 어린 초승 달님은 달 중에 제일 예쁜 꽃잎이래요 천성으로 지닌 둥그런 사랑 강보에 ᄊᆞ여 모르는 채로 하루 건너 발그레 벙그는 얼굴 기러기도 구름도 들여다보곤 황홀히 입 맞추며 떠난답니다 바람 함께 조심조심 지난답니다 (1990. 8. 31.) _ 서른 중반을 넘긴 딸과 제가 거실 창가에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만개한 날이었지요. ᄄᆞᆯ과 저는 35년+35년 동안의 추억을 불러냈습니다. 그러다가 저 달이 정말 그 옛날 그 달일까? 제가 ᄃᆞᆯ을 향해 불쑥 물었습니다. “야, 니가 진짜 그때 그- 달이냐?” “엄마, 저 달이 나이가 몇인데 반말이에요?” (아아, 얘가 동시를 잘 지었었는데···, 열어줘야 했는데···, 文이···, 세상이···, 힘..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8 정숙자 기쁨은 부서져 진흙에 떨어지고, 슬픔은 내내 솟구쳐 그것만이 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모처럼의 햇빛, 백일하에 사라진 창가에 서서 껐ᄃᆞ - 켰ᄃᆞ 생각을 반복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 암울暗鬱을 우주 밖으로 힘껏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슬픔도 기쁨도 아닌 고요가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 ‘거기 정박하기 위하여서는 흔들림이 필요했던 것이니라, 고··· 고요는 맨 나중에 닿는 섬이니ᄅᆞ, 고··· 뒤늦게, 뒤늦게 어림짐작하는 오늘은 또 다른 어제입니다. (1990. 8. 25.) _ 공우림空友林이라는 집의 이름을 저 무렵에 지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먼 길을 돌아왔는데, 다시금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꾹꾹 참고 잘 살아왔는데, 이제는 아무리 좋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