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2671

목련 정원/ 곽효환

목련 정원      곽효환    내 앞에 있으나 등 들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하늘 아래 가장 먼 거리를 봅니다   붉게 빛나면서 점점 어둠에 잠기는 봄날 저녁  어두울수록 환하게 빛나는 목련꽃 그늘에  내 얼굴은 잠겨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고 깊은 심연   먼 곳을 바라보는 그 사람은  저 너머와 이곳을 잇는 열쇠 구멍인데  아람어를 모르는 나는  꽃그늘 아래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몸을 돌려 손 내밀면  내 마음은 요동치며  피고 지고 피고 지는 꽃들의 정원이 되고  뇌우가 쏟아지는 평원이 되었다가  낙엽 지고 눈 쌓인 설원이 될 터인데   어느새 꽃잎을 다 떨군 목련 정원에서  먼 곳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목련 한 그루를  나는 마냥 바라봅니다  ..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그 겨울은 없다      원탁희    고구마가 주식이었던  내 유년의 겨울은 참 길었다  눈도 많이 내렸으며  처마 밑 고드름은  땅까지 길게 늘어졌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은  겨울이 하루처럼 지나간다  눈도 내렸다 금방 녹아내리고  처마 밑 고드름은 보이지 않는다   해진 옷과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고  눈 내린 조그만 골목길을  검정 고무신으로 내달리던 날들도   호호 언 손을 입에 불다가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기도 하고  처마 밑 고드름 뚝 따내어  입에 넣고 쪽쪽 빨기도 했던 그날들은  이제 없다 그 찬란했던 겨울은   겨울은 겨울답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는데   이제 그 겨울도 없고  사람다운 사람도 이제는 떠나고 없다   서산에 긴 그림자만 장승 되어 서 있을 뿐이다    -전문(..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교실 창가에 기대어 흰 운동장 너머  바라보면 남해바다 한쪽이 정답다  바다가 있는 교실 풍경  몇 걸음 내달리면 닿을 아름다운 거리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나는 꿈의 바다 대신  상춧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 되었다  들판에 들꽃 지천인 봄날 때 씻긴다고  우루루 줄지어 아이들 냇가로 몰고  지루해진 오후, 냉이꽃과 싸리나무와 종달새  그리려 자주 언덕에 올랐다   뽀뽀한다고 달겨들던 코찔찔이 1학년 철이랑  가난해도 의젓했던 화전민 반장 준이는  너른 세상바다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다시  씀바귀 잎 같은 선생 노릇이나 해 볼까  이층 바다 교실 창가에서, 우두망찰  바다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