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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名/ 노혜봉

이름 名      노혜봉    캄캄할수록 가득 차 하늘꽃이라 불러본다  아버지 얼굴 흐릿해 불화살 맞은 해바라기꽃이라 부른다  멍들어 가슴에 새긴 혈흔, 도장꽃이라 써 본다   나 죽으면 불러줄 이 없는 그 이름 실컷 불러본다  하루아침 훌쩍 지구의 회전문이 열려져, 그 옛날  우주로 출타하신 이후, 아무도 아버지 성함  써 드린 일 없는 노용석盧龍錫, 그 이름,   문갑 서랍을 열고 상자 속에 고이 모셔 둔  아버지 상아도장을 꺼내, 오랜만에 문질러 본다  싸늘한 돋을새김에 소름 살아 오르듯 촉촉한 체온  시집와서 생신날 제삿날 까맣게 잊고 못 챙겨 드린 일  밀린 참회록 내리 써 놓으면 꽃도장으로 지워 주실까   곤히 잠들어 있는 어머니 눅눅한 그늘 곁  가족관계증명서에 아버지 검지손톱 담뱃진 맡듯이..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영미네 백반집      황상순    궁금하다  돌을 건져 올려 어떻게 미역을 만드는지  푸른 물결을 어찌 통째로 치마폭에 담아올 수 있었는지  오늘 무슨 날이기에  남해바다가 가지미와 조개를 앞세우고  아침부터 뜨겁게 이곳에 들렀는지  단돈 오천 원에 돌미역국이 다 나오는지   영미야, 생일 축하해     -전문(p. 58)  ---------------------  * 시터 동인 제7집 『시 터』 2022. 11. 10.   펴냄   * 황상순/ 1999년『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농담』『비둘기 경제학』등

변신/ 박판식

변신     박판식    내일 내 꿈은 핑크입니다  꿈도 가끔은 색깔이 필요하다는 게 놀랍습니다   핑크가 그렇게 다양한 줄 몰랐습니다  고흐의 핑크, 뭉크의 핑크, 마네의 핑크, 샤넬의 핑크  셜리의 핑크······  면접관의 서류철 속에서 꿈은 비닐 포장이 되어 하나씩 번호를 부여받고  보살은 불가해를 손에 넣습니다   보살은 온몸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183센티미터의 잘생긴 보살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중생을 찾고 있습니다   생각은 전화처럼 옵니다, 받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매 시각 분초 단위로 알람이 울립니다   훌륭한 생각에도 매너리즘은 있습니다  꿈속에서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생을 낭비하는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서도 자신이 고객이라고 착각하는 중생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