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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_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부분)/ 꽃은 지고 : 박재두

꽃은 지고      박재두(1936-2004, 68세)    아홉 겹 성곽을 열고 열두 대문 빗장을 따고  바람같이 질러온 맨 마지막 섬돌 앞  뼈끝을 저미는 바람, 추워라, 봄도 추워라   용마루 기왓골을 타고 내리던 호령 소리  대들보 쩌렁쩌렁 흔들던 기침 소리  한 왕조 저문 산그늘 무릎까지 묻힌다.   다시, 눈을 닦고 보아라. 보이는가  칼 놀음. 번개 치던 칼 놀음에 흩어진 깃발  발길에 와서 걸리는 어지러운 뻐꾸기 울음.      -전문(1981년)   ▶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 사량도의 시인(부분)_유성호/ 문학평론가      전남 통영의 사량도 능양마을에는 「별이 있어서」라는 작품이 새겨진 박재두 시비가 서 있다. 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의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

광야/ 김남조

광야     김남조(1927-2023, 96세)    오늘 이미 저물녘이니  나의 삶 지극민망하다  시를 이루고저 했으되  뜻과 말이 한 가지로 남루이었을 뿐  생각느니 너무 오래  광야에 가보지 못하였다   그곳은 키 큰 바람들이  세월없이 기다려 있다가  함께 말없이 오래오래  지평을 바라보아 주는 곳  그러자니 어른이 좀 되어 돌아오는 곳   삶의 가열한 반의 얼굴,  혼이 굴종당하려 하면  생명을 내던지고 일어설 계율을  이 시대 동서남북  어느 스승이 일깨워 주는가  어느덧 나는 사랑을 말하지도 않고  번뇌하는 두통과도 헤어져    반수면의 수렁에서  안일 나태한 나날이다가  절대의 절대적 위급이라는  음습한 독백에 부대끼노니    필연 광야에 가야겠다  그곳에서 키 큰 바람들과  말없이 오래오..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도마뱀 꼬리가 보이는 계곡      신명옥    달리는 소리에 계곡은 늘 깨어있고  앉기 편한 돌을 골라 발 담근 내가  소리 내며 달리는 투명한 물살을 들여다본다   불룩하거나 움푹 파이는 물의 굴곡은  정교한 사슬의 톱니들 같다   무수한 초침들로 분주한 도시의 하루  되돌릴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소스라치듯 욕망의 트랙을 달려간 바퀴들은  모두 어디에 가있을까   서늘한 그늘 좇아 자리를 바꾸는 내가  초침에서 분침으로 느슨해진다  나무처럼 하늘 향해 귀를 세우고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지금  비로소 시간 밖으로 나온 것 같다   떨어진 잎이 뜬구름 위를 천천히 맴돈다  달려간 이들이 닿은 피안이 저곳 같아서  이쪽과 저쪽의 거리를 가늠하는 동안   미늘에 물려 기울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