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since 1970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 파리의 자살가게 : 김상미

검지 정숙자 2022. 2. 18. 01:35

<since 1970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

 

    파리의 자살가게*

 

    김상미

 

 

  죽고 싶은데 파리까지 가야 하나요?

  이곳엔 왜 자살 가게가 하나도 없나요?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너무 가혹해요

  성미 급한 사람들은 오래전에 벌써 다 죽었는데

  찬송가 493장을 펼치고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보이지 않아

  비탄의 금잔화 한 다발을 사들고 오늘도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파리행 티켓은 너무 비싸고 아득해요

  죽음이 간절해질수록 삶은 더욱 쓸쓸해지고

  죽음의 형식 또한 마지막 잎새처럼 갈수록 초라해져요

  이곳에도 자살 가게를 만들어줘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내 가슴이 울고 있어요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건 마지못해 산다는 것

  삶이라 불리는 그 수수께끼를 일찌감치 푼 사람들도

  피가 나도록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이 지상에 무덤 하나 달랑 남겨놓고 떠나버렸는데

  이 세상과 멀어질 대로 멀어진 내 삶을 안고

  정말 파리까지 가야 하나요?

  요나처럼 고래 뱃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요

  그러면 혹 살고 싶어 발버둥이라도 쳐보지 않을까요?

  파리행 티켓을 구하지 못해 죽지도 못하는 죽음 앞에

  삶이란 얼마나 잔인한 은총인가요?

  매일매일 알프스산맥을 넘는 꿈을 꾸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파리에 도착하게 되겠지요

  신나게 파리의 자살 가게 문을 두드리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누구보다도 절망적으로

  마침내, 드디어 죽게 되겠지요

  우리 할머니 우리 엄마 우리 언니들처럼

  오, 아름다운 나날들의 눈을 기쁘게 감길 수 있겠지요

  활짝 핀 동백꽃이 새빨갛게 황혼을 물들이며 뚝뚝 떨어지듯이

     -전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 4.)

 

     *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제목.

 

 1970년대 이후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_정숙자/ 시인

  산업화/상업화는 등가 선상에 놓인다. 그에 따른 시장경제원리로서 외적인 편리와 심적 고통은 빈부의 격차와 함께 반비례 현상을 일으킨다. 경제환경은 삶의 행불행과 직결될 수도 있다. 1970년대 이후 2021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명/문화의 뒤안길을 데생한 김상미의 「파리의 자살 가게」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건너 ‘서울의 우울’이라 이를 만하다. ▩ (p. 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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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징학 연구소 2022-봄(5)호 <-since 1970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시> 에서  

  * 정숙자/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