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 기억과 기록/ 리코딩(recording) : 한창옥

검지 정숙자 2019. 12. 4. 02:06

 

 

    리코딩recording

 

    한창옥

 

 

  무중력의

  하얀 털신은 희고 흰 밤 긴 춤을 추었지

 

  무시로 쑤군거리는 무적의 하얀 용사들

 

  귀를 부비며 눈 더미에 뒹굴었던 그해 겨울 지독한 환희는

  누가 잡아당기듯 차가운 손을 불며 사라졌다

  아직도 꽁꽁 언 손은 흰 눈 품에서 춤을 추지만

 

  털신 속으로 숨어버린 몸은 미동 없는 매듭이 된다

 

  차가운 감촉을 남긴 겨울은 가고

  사방을 둘러봐도 하얀 밤을 외치던 불후의 노래는

  추적 추적 골 깊이 쌓여만 갔다

 

  담장에는 찔레꽃이 흥건했지만 겨울은 다시 왔다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물컹한 어둠이

  아무 대상도 없이 곤두박질 반복하는데

  무중력의 차가운 호흡만이 절룩거리고 있다

    -전문, 『미네르바』2019-가을호

 

 

   기억과 기록/- 한창옥 시인의 「리코딩recording」을 읽고/  정숙자/ 시인    

  기억은 중력을 벗어난다. 기억은 경험에 의거하되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차원의 공간에 저장된 시간이다. 그에 반해 기록은 글이나 그림 등 시각적으로 열람 가능한 자료로써 언제든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물증으로서의 몫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억과 기록의 차이란 적지 않다. 기억은 오직 본인 한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지만, 기록은 시공을 초월하여 공개되고 면면히 이어질 뿐 아니라, 사실 이상의/상상의 공간까지를 담보/제공한다. 그 결과 지구의 모든 생명체 중에 인간만이 유구한 역사를 보존할 수 있었고, 각계각층의 발전은 물론 문화 및 문명까지도 창달할 수 있(었)다.

 

   위의 시 「리코딩recording」은 첫머리에 “무중력”이라는 물리학 용어가 배치되었다. 종래의 서정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인문학적 어휘만으로 직조된 언술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새로움이 획득되었다. 바로 뒷줄만 보더라도 ‘겨울밤’이라고 직접적으로 풀어놓은 게 아니라 “하얀 털신은 희고 흰 밤 긴 춤을 추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겨울밤’임을 유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언어미학의 섬세함과 다음 문장에 대한 궁금증을 일깨우는 탄력을 예인하기도 했다. 이 짧은 행간에서도 현대시가 요구하는 기법과 의미를 동시에 수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은 “털신 속으로 숨어버린 몸은 미동 없는 매듭이 된다”고 고정된 기억을 현재시점으로 소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현재시점은 과거를 수반했을 때만 가능한 미래완료형의 결정적 추론이다. 시적 주체는 여러 번의 겨울을 맞이하고 또 떠나보낸 경험 속에서 “하얀 밤을 외치던 불후의 노래”가 “미동 없는 매듭”이 된다는 점을 돌이켜 사유하며 만감에 젖어든 것이다. “추적… 추적 골 깊이 쌓여만” 가는 눈 오는 밤은 오늘밤이기도 하고, 아카식레코드(우주도서관: Akashic records) 기록된 수십 겹의 겨울밤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정서의 작품화가 완결성을 더한다.

  

   앞서 '기억은 중력을 벗어난다'고 말했거니와,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클라나멘’이란 중력이나 관성에서 벗어나는 힘을 뜻하므로 ‘기억’에 포개놓는다 해도 무리가 아닐 성싶다. 오늘의 ‘나’를 형성한 기억들은 중력이나 관성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무중력”의 공간에 실재하며, 위안을 주지 않는가. “추적… 추적”은 현재의 심경을, “털신”, “흰 눈” “춤” 등은 어린 시절의 행복을, “담장에는 찔레꽃이 흥건했지만 겨울은 다시 왔다”에서는 인생역정의 전반을 관조한다. 나아가 이 시의 후미에서 화자는 암울에 처한 현실을 깊은 음색으로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물컹한 어둠이

  아무 대상도 없이 곤두박질을 반복하는데

  무중력의 차가운 호흡만이 절룩거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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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포엠』 2019-겨울호 <『포엠포엠』에서 본 시>에서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