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넥스트(next)에서 엑시트(exit)까지/ 주동자들 외 4편 : 진혜진

검지 정숙자 2019. 12. 16. 00:49

 

 

<『포지션』2019-가을호, 무기명으로 '발표/읽기'되었던 시 5편은

  『포지션』2019-겨울호에 진혜진 시인의 작품이었음이 공개됨>

 

        

    주동자들 외 4편

 

    진혜진

 

 

  갑시다 가서 설득합시다

  그는 동원되지 않고 문이 동원됩니다

 

  문에 끼인 얼굴이 한 사람에서 두 사람 세 사람이 됩니다

 

   이해 불가한 손잡이입니다 문 안에는 첫 케이크가 있고 손뼉을 쳐줄 손바닥은 없습니다 전화의 수신자가 없고, 그의 비밀은 번호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나오지 않는 발끝이 라일락 향기입니다

 

   바깥의 설득과 반대편의 상실을 거로에게 내밉니다 첫 웃음을 후회와 교환합니다 한 번에 징후가 탄생합니다 배후가 누구인지 누구의 염탐인지 문은 헷갈립니다

 

  바람의 거스러미가 문턱에 걸립니다

 

  갑시다 가서 생일이 됩시다

  구호만 있고 대답이 없는

  극장을 색출합시다

 

  그가 다시 문으로 나올 때까지

  기억을 모두 봉쇄합시다

 

  우린 우리가 아닐 때 비로소, 주동자가 됩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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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플라워

 

 

  완벽한 피라미드 모양이다  

 

  잘 마른다는 것은 꽃이 방식을 거꾸로 세우는 일

 

  꽃의 심장과 결탁하면 본능은 과연 필까 꽃의 수요일과 결탁하면 마침내 고백이 될까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날, 그래도 꽃은 꽃이다

 

  피라미드에 갇힌 중심이 없는 우리

  한 잎 바스락거림 속에 미라는 누구의 결말일까

 

  싱싱하던 본색들은 다 어디로 갔나

  갖고 싶은 욕망은 마르지 않는데

  우리라는 전설은 찾을 수 없는데 무덤만은 완전하다

 

  무성했던 안개가 한 다발의 화석이 되어 멈추는 일은

  오늘을 제사장의 입맛에 맡기는 일이다

 

  마른 꽃을 화단에 묻는다 한 송이 한 송이 떼어서 버리고 싶은데 한꺼번에 무너진다

  무엇이든 함께 묻어주고 싶다 우리가 나누 낀 이어폰, 이집트 달력 속 파라오의 박제된 표정, 노예처럼 남겨진 감정까지

 

  다발을 밀어낸 벽엔 선명한 자국이 남는다

  그 속에 안치된 여운, 불후의 벽, 다신 꽃을 사랑하지 않을 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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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기오카리나

 

 

  입술은 딸기로 가는 입구를 모릅니다

 

  당신의 빛에 묶인 나는 구멍 속

  리드를 읽지 못했습니다

  귀퉁이의 누구 하나를 기억할 뿐

  주렁주렁 매달린

  포스트잇과는 별개입니다

  딸기의 등줄기를 따라가면

  버려진 입술들이 텅잉텅잉

 

  아홉 개의 구멍이 당신을 채우고

  교차점을 건넙니다

  암실을 밀실로 읽는 나는 숨찬 운지법이 됩니다

  가끔 여덟 번째 구멍에서

  침묵이나 배반이 나오고,

 

  구멍을 모두 닫습니다

  그 어떤 떨림도 울림도 되지 못합니다

  내 지문을 더듬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놓칩니다

 

  손가락을 떼는 순간

  관계는 음악이 됩니다

  반려에서 반려叛戾까지

  당신은 점점 빠르게 흩어지고 

 

  나는 당신도 딸기도 잊은 듯 입술을 뗍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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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이데아

 

 

  보전된 숲은 보수적이다 이전의 숲은 이데아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없으면 숲은 파국, 나무의 호소력이다 이 풍경은 당신의 습관이다

 

  벌목당한 기억을 걷어낸다

  걷고 걷다 보면 무성한 낭떠러지

 

  빛과 그림자가 대비된다 풍경의 동음어들은 같은 편인가 바람이 불련 풍경에서 종소리가 달아난다 수행자가 소리 내어 읽는 경문도 풍경, 당신의 한 달 치 보수도 풍경

 

  살아가는 모든 것이 보수가 될 수 없다

 

  확실히 아파트는 풍경이 아니다

 

  어제의 콘크리트와 오늘의 콘크리트가 갖는 감정은 다르다 당신의 오른손과 젓가락은 한편, 뿌리 같고 메타세쿼이아 같고 용서 같은 자세가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은 혼자 불지 않는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 오류다

  좋은 일은 끝까지 좋은 일이고

  숲을 솎아내도 풍경은 처음부터 풍경이다

 

  철학자의 미학을 떠올린다

  추의 미, 동조할 수 없다

  부조화는 과정에 불과할 뿐

 

  바람이 부는데 종소리가 없네 낡고 부서진 풍경을 손봐야지

 

  당신은 어느 풍경의 소속인지

  날고 있는 저 물고기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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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즘

 

  펜은 유일한 믿음이 된다

 

  연애할래? 아나키스트

 

  눈을 뜨면 싫어 좋아

  잠이 들면 좋아 싫어, 그런 날이면

 

  양초를 사고 마스크를 사고 자주 악수를 하면

  불빛은 옆구리까지 흔들려

  방 안에 있는

  펜은 유일한 믿음이 된다 

  빈약합니까

  왜 용서는 확률입니까

 

  이탈한 질문, 이탈한 의혹, 의혹의 7할은 너라는 신발 속 발가락

 

  아나키즘이든

  투사이든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의 반쪽이 자신의 전부라니

  반쪽도 못 되는 사람, 어디가 머리입니까

  펜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손을 잡으려 해도 내 손을 딱 두 개뿐

 

  매번 경계 앞에서 수많은 너를 놓친다

  학명을 구성하기엔 네가 너무 많다

 

  끝내 벗어날 수 없는

  달아날 수도 없는

  꼭 필요한 다짐들

  펜 아래 있다

     -전문-

  

   넥스트(next)에서 엑시트(exit)까지_ 정숙자/ 시인                                       

  지상에 깨어난 모든 생명체는 ‘다음’을 위해 오늘을 산다. 여기서 말하는 ‘다음’의 벡터(vector)와 텐서(tensor)는 내일일 수도 있고 좀 더 먼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각양각색의 오늘은 내일이 걸린 문고리이며, 다종다양한 개체들의 모든 어제는 끝없이 출렁이는 길로 흐른다.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육해공의 그 많은 길들이 서로서로 얽히고설키며 세계와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제 몫의 삶. 그 커다란 짐을 지고 우리는 낯선 시간과 고뇌를 한사코 여닫으며 굽이굽이 나부껴야만 한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태양을 호흡하며 눈뜨고 잠들건만 어찌하여 저마다의 가슴 속 풍경은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누가 불렀기에 우리는 여기 왔는가. 무엇을 찾으려고 여기 문 열었는가. 구태여 몸을 얻어 울부짖으며 여기 이곳에 도착했는가. 알 수 없는 문, 그 첫 번째 문이 출생의 문이다. 텃밭의 무순보다도 약한 손으로 어떻게 여기 이 지구의 문고리를 당겼단 말인가. 삶이 뭣인지도 모르면서, 이 사막이 어떻게 헤엄쳐야 할 바다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까닭으로 여기 들렀단 말인가. 한 걸음 한 걸음 피와 함께 다잡은 정신으로 모색해야만 한다. 판단해야만 한다. 선택해야 하고 실천해야 했으며 ‘인생’이라는 수레를 잘 이끌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혹자는 전쟁을 일으키고 혹자는 춤추지만, 시인은 홀로 괴로워했다.

  시인의 노래. 그것은 악보도 색채도 없는 영혼의 파노라마다. 오로지 언어로써만 베틀을 가꾸는 아라크네(Arachne)의 직물이며, 미네르바(Minerva)의 지혜를 빌려야 하는 능산적 소산이다. 현대시, 모더니티(modernity)는 영감에 의해서만 빚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작품-만들기’이며 완성도에 있어서도 입체각이 따라야 한다. 원석에 해당하는 발상 자체만으로는 미상불 수월성이 담보되지도 않는다. 장인의 공을 거쳐야만 명실공히 보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이제 현장은 쉽게 읽히는 시만을 공급하거나 섭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조어 차연差延은 ‘차이+유보’이므로 참값이 아니겠는가. 

 

 「주동자들」주동자는 벌써 단수가 아닌 복수임을 선언했다. 이미 단체가 성립된 상태다. 필시 그럴만한 동기가 있었을 테고, 의기투합할 정도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증거다. “갑시다 가서 설득합시다”라고 기치를 올린 최초 발의자는 자기 자신, 또는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라든지, 소규모의 집단이라 할지라도 개선해야 할 사안에 대해 꿰뚫고 있음이 분명하다. “갑시다 가서 생일이 됩시다” 혁신에의 바람과 확신에 찬 의지가 엿보인다. “구호만 있고 대답이 없는/ 극장을 색출”하려는 모종의 봉기인 셈이다. 격문에 가까운 문장. 여기서 주체가 염두에 둔 대상은 한두 명의 ‘배우’나 관계자가 아닌 ‘극장’ 자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주동자들”은 누구일까? 그 극장이야말로 삶의 터전이며 ‘다음’을 열어가야 할 광장일 수밖에 없는 곳인 즉, “그가 다시 문으로 나올 때까지/ 기억을 모두 봉쇄합시다” 그들은 “바람의 거스러미”를 거스르며 외로운 긴장을 달구고 있다.

 

 「드라이플라워」여기서 ‘꽃’은 사랑이며 오래 간직한 희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꽃은 말라버렸다. 그것도 나무에서 자연스레 진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 수분을 잃어버린, 생명력이 증발된 꽃 “박제된 표정”이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날, 그래도 꽃은 꽃”이라고 시적 주체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싱싱하던 본색들은 다 어디로 갔나” 지난날을 성찰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고하는 주체는〓사고하는 주체이므로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갖고 싶은 욕망은 마르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라는 전설은 찾을 수 없”지만 “무덤만은 완전하”니 말이다. 기억이야말로 완전한 피라미드이자 탑이 아닌가. 식물이 아닌 우리 인간은 경험의 계단 위에서 새로운 전설을 얼마든지 꿈꿀 수 있다. “마른 꽃을 화단에 묻”어 버렸으므로 ‘다음’이 열릴 차례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에이미 햄플. 권승혁 옮김『사는 이유』「보고타 사람」p.160. 2018. 어마마마.) 

 

 「딸기오카리나제목이 ‘딸기 오카리나’가 아닌 「딸기오카리나」이다. ‘무슨 뜻일까?’ 유추하며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렸더니 딸기 모양의 외국산 오카리나가 상품으로 펼쳐져 있다. “아홉 개의 구멍이 당신을 채우고”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에 표상된 오카리나는 악기를 차용한 인격의 은유라는 독해가 어렵지 않다. ‘딸기(모양의)오카리나’에서 괄호 부분을 빼버림으로써 현상에서 현상학으로의 건너뜀이라는 기의도 함께 말이다. 딸기가 지닌 달콤함과 신선함, 색깔과 계절 등 선율을 논하기 이전에 벌써 5월의 향기가 리드미컬했지만, “가끔 여덟 번째 구멍에서/ 침묵이나 배반이 새어 나오고,// 구멍을 모두 닫습니다”라는 결정적 커브가 나타난다. 사계절 중 가장 풋풋하고 에로스-에너지가 충만한 5월, 여운으로서의 「딸기오카리나」였던 것이다. “나는 당신도 딸기도 잊은 듯 입술을 뗍니다” 첫 행에 피력한 “입구”와 마지막 행의 “입술”은 그와 나의 슬픈 엔딩이자 새로운 오프닝의 예고이다.

 

  「풍경 이데아」이제 시인은 본격적으로 철학적 사유의 문을 열었다. “벌목당한 기억을 걷어”내고 “걷다 보면 무성한 낭떠러지”가 있다는 점도 수용한다. ‘무수한 낭떠러지’가 아니고 ‘무성한 낭떠러지“라는 발언에서 해사구조의 문장도 산뜻이 새겨 넣었다. “바람이 불면 풍경에서 종소리가 달아난다”는 건 뭔가? 추녀 끝 매달림에서 벗어나는 해방감, 즉 내면의 초상을 환치한 순간이다. 그리고 또 “확실히 아파트는 풍경이 아니다”에서 점찍은 ‘풍경’은 댕그렁 울어주는 풍경과 전혀 다른 경치로서의 풍경이며, 이 행간에서 시적기법이 요구하는 전환까지를 구축했다. 그것도 동음이의어를 이끌어 기지와 재치의 효과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은 혼자 불지 않”으며, “좋은 일에는 탈이 많”고, “부조화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라고 인생역정을 성찰하기도 한다. “바람이 부는데 종소리가 없네 낡고 부서진 풍경을 손봐야지” 어느덧 시인의 마음은 하 맑아 어떤 불순물도 없는 순백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나키즘」그러므로 시인이다.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시인이다. “펜은 유일한 믿음이 된다” anarchy→anarchism→anarchist, 이는 앞서 말한 어느 단체나 조직이 아닌 자기 자신, 다시 말해 단독자의 수많은 고뇌와 신음으로 분절된 시간들의 집합이고 결단인 것이다. 시인은 시로 말하는 사람이며, 시로 행동하는 사람이며, 시로써 다시 사는 사람이다. 펜! 그것 말고 시인에게 무엇이 더 병기일 수 있겠는가. “매번 경계 앞에서 수많은 너를 놓”쳐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달아날 수도 없는/ 꼭 필요한 다짐들”이 “펜 아래 있다”고 이 시는 끝을 맺는다. 새로운 수미상관의 예로 기억해 둠직하다. 하나의 고통과 인연에서 풀려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기싸움을 거쳐야 하는가를 반추한 상념들…. “만년필은 단 하나의 우리다”(최문자 시집『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분실된 시」 2019, 민음사.)라는 문장을 연상케 한다. 이렇게 감동적인 결정을 건지기 위해 시인들은 먹물에 투신하는 생애가 아닌가.  

 

  플라톤 철학의 주요 개념인 ‘이데아’를 모르는 지식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라캉은 ‘실재계’를, 헤겔은 ‘즉자’를그 외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구/정립하고 확실한 명제로서 체계화했다. 시인에게 그를 대변하는 대표시가 따르듯이 역사를 거슬러 우뚝 선 철학자들은 그 명제에 상응하는 정합적 논리와 디테일한 삶의 궤적까지가 국경을 초월하여 회자되기 마련이다. 빛바래지 않는 산맥이 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집념과 고투, 또 이성의 총합인지를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이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한 그림자를 그림자 이상의 별자리로 정박시킨 이가 아닐까.

  이 세상이 설령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할지라도 우리는 일초일순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적 과제인 의식주와 정신세계 역시 황폐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고뇌에 찬 삶을 일컬어 플라톤은 “인간이란 죄수요, 감목 문을 열고 도망갈 권리가 없다”(플라톤『파이돈』, 崔明官 譯. 乙酉文化社, 1981. p.100.)고 언명했다. 그것은 현자의 지혜가 빚은 ‘인내에의 권유’이자 ‘생명 사랑’이었을 것이다. 호메로스의 제자인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고,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던 플라톤. 그는 이데아와 그림자 사이에서 한때의 노예생활마저도 몸소 견디고 겪어내었다.

  보다 나은 세계와 삶을 꿈꾸며 인류는 진화해왔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간의 내면은 피폐에 황폐를 거듭해왔다. 윤리/도덕이라는 기본 질서조차 고전적 언어가 되어가는 마당이다. 우애나 우정에서도 신의가 증발된 지 오래. 개인주의와 경쟁 심리로 말미암아 ‘문우’의 등고선마저도 낮아지는 작금이다. 예나 지금이나 철인은 홀로 생각하고 시인은 홀로 야윈다. 오늘의 중심 시편인「풍경 이데아」에서 “바람이 불면 풍경에서 종소리가 달아난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종소리는 더 크게- 더 멀리- 깃 치며 날 것이요, 풍경은 제 그림자를 가다듬으며 탈옥의 순간까지 정히 노래할 것이기에. (p.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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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19-가을호 <POSITION ① 블라인드 시 읽기/시평>에서

 * 진혜진/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신춘문예로 등단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