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백석(1912-1996, 84세)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세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전문-
▶한국 문학과 자연(발췌)_ 노용무/ 시인 · 문학평론가
인용시의 경우, 백석 시의 전형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걸쭉한 지역어와 걸맞는 토속적 세계를 특정 시적 공간의 토박이 출신인 '나'를 내세워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백석은 성주님, 다운구신, 조앙님, 데석님, 굴대장군, 털능구신, 수문장, 연자망구신, 달걀구신 등을 방안, 토방, 부엌, 고방, 굴통, 뒤울안, 대문, 밭마당 연자간, 길거리 등의 구체적인 장소와 맞물려 한 마을의 전통적인 삶과 어우러진 민간 신앙을 익살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는 근대 지향성의 시인들이 간과했던 전통적 민속의 풍경이자 우리네 구체적 삶을 통해 인지되는 자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관계란 시에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처럼 인간과 자연물이 수동적이지 않고 상호교호하며 간섭하는 사이다. 인간은 자연을 분석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않고고, 자연은 인간에 의해 그려지는 대로 타자화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시적 화자인 '나'의 삶에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자연물로서의 사물과 사물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체험과 명상이 깃든 장소가 되고, 물리적 대상뿐만이 아닌 경외와 섬김 혹은 일상적 삶의 시적 대상으로 승화된다. 따라서 흔히 우리의 심상 속에 그려지는 자연의 이미지는 모두 우리네 삶과 일정한 영향 관계를 지니고 있는 이미저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는 삶의 터라는 인식이다. (p. 시 239-240/ 론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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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당문학』 2023-상반기(15)호 <문학 평론> 에서
* 노용무/ 19??년 『시문학』으로 등단, 19?? 『수필과 비평』 신인 평론상 수상, 시집『시똥구리』『나무전봇대』, 저서『시로 보는 함민복 읽기』『탈식민주의 시선으로 김수영 읽기』『시인의 길 찾기와 그 여로 읽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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