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늪/ 박수현

검지 정숙자 2022. 4. 9. 03:10

 

    늪

 

    박수현

 

 

  그는 늪 기슭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지난밤, 달빛 같은 잔기침을 앓던 그

  건너편 바위의 흰 산나리 무리가

  초록 물그늘 사이사이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입술이 파래지게 헤엄을 치던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햇살을 받은

  잔돌들이 발바닥에 따뜻하게 밟혔다

  힘껏 조약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떴다

  초파일 연등처럼 넝쿨지는 물무늬 속에서

  젊은 그는 오르간의 건반을 누르고

  아이들은 갯가의 옥수수가

  햇노랗게 여물도록 노래를 불렀다

  바닥을 모른다는 늪의 수면에

  은입사 금입사된 햇살들이

  한숨 같은 바람결에도 아득히 부서져 날리고

  창포며 부들, 생이가레 틈서리엔

  자라 새끼들이 가뭇하게 오글거렸다

  일짚모자 밑으로 흘러나오는 가쁜 기침 소리에

  늪도 쿨룩쿨룩, 두어 뼘 더 어둡게 감겨들었다

  자라 피가 담긴 아자 무늬 흰 약사발이 마당에 내던져졌다

  돌확 옆 맨드라미도

  신열을 앓으며 피점처럼 붉게 타올랐다

  늪의 자라들이 다 파먹었는지

  무성한, 그리운 그의 얼굴이

  늪의 수면에서 잘게 부서지다 가라앉았다

  나를 낳고 오동나무 한 주를 심었다던

  턱이 긴 그가 오래 뒤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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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우리들의 얼굴 찾기 3 『그의 얼굴』에서/ 2022. 3. 22. <청색종이> 펴냄

  * 박수현/ 2003년『시안』으로 등단, 시집『운문호 붕어찜』『샌드 페인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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