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촌티의 딸/ 이화은

검지 정숙자 2022. 4. 9. 02:53

 

    촌티의 딸

 

    이화은

 

 

  풀 먹인 자존심을 빳빳하게 목에 두른 흰 카라의 여학생은 결코 촌티의 딸이 될 수 없었다

 

  가을걷이 끝나고 쌀이었던가 콩 자루를 무겁게 들고 상경한 아버지와 하굣길에 딱 마주쳤는데

 

  서툰 궁사처럼 내 시선은 아버지 얼굴을 명중하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빗나간 시선의 의미를 귀신같이 알아챈 아버지는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는 함께, 공모하듯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불효와 죄인을 만드는 데 아버지도 한몫 거들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아버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내가 명중하지 못한 얼굴을 아버지가 꽁꽁 숨기신 것이다

 

  나는 가끔 자주 과녁이 없는 화살을 허공에다 쏘아댈 뿐

 

  애써 아버지 얼굴을 더듬어 찾아가면 콩 자루를 무겁게 든 늙은 구름이거나 종합병원 후문이었다 겨울 갈대밭이 모르는 척 돌아앉아 있었다

 

  나는 결국 늙은 구름의 딸이었다 후줄근한 종합병원 후문이거나 꺾어진 갈대의 딸이었다

 

  눈 코 입이 없는 아버지 얼굴을 물고 새떼가 자욱이 몰려가고 텅 빈 혯날 하늘에서 촌티가 줄줄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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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우리들의 얼굴 찾기 3 『그의 얼굴』에서/ 2022. 3. 22. <청색종이> 펴냄

  * 이화은/ 1991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절반의 입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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