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살만 남은 부채/ 김 영

검지 정숙자 2012. 7. 31. 02:40

 

 

      살만 남은 부채

 

         김 영

 

 

   덥네요.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닷가 쪽으로 나가 걸을 eO는 견딜 만한데 숙소인 시내로 들어오면 완전히 찜통 더위네요. 더군다나 우리가 숙소로 쓰고 있는 집은 얇은 콘크리트 벽이 바깥세상의 더위를 막는 유일한 도구지요. 늙은 선풍기 한 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에요. 올레길을 걷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이 턱턱 막혀요. 집주인인 후배는 이력이 났는지 잘 견디는데 손님으로 온 우리들에겐 너무 힘든 날씨예요. 게다가 습기까지 머금고 있어서 더울 수 있는 조건은 다 갖추었네요. 선풍기 바람도 싫어하고 에어컨도 싫어하지만 더 참지 못하고 덜컥 에어컨을 사버렸어요.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한 편이었어요. 아버지를 닮아서 성격이 급하다고 해도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난그게 좋았어요.

   할머니가 오래 병중에 계셨을 때예요. 성은 마당에 화롯불을 내어 놓고 탕약 불 조절하는 일을 제게 맡겼어요. 부챗살에 붙어 있던 종이는 다 녹아버렸거나 찢어져서 달아나고, 살이 거의 다 드러난 앙상한 부채를 제 손에 쥐어주었지요. 그걸로 화롯불을 살살 부채질하며 탕약이 끓어 넘치는지 잘 보라고 했어요. 나는 그 부채가 싫었어요. 무엇이든지 끔찍하게 아끼는 성이 또 다 닳은 부채를 아끼며 사용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화롯불 속에 그 부채를 집어넣었어요. 그리고는 새 부채를 집어 들고 화롯불을 부치기 시작했지요. 불이 확 일어나며 탕약이 부르르 끓어 넘쳤어요. 재빨리 약탕기 뚜껑을 열어 탕약이 넘치지 않도록 했지요. 그러고는 너무 세게 부채질을 했나 싶어 이번에는 아주 가만가만 부채질을 했지요. 불땀이 약하더라고요. 불 조절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자 나는 성에게 하기 싫다고 짜증을 냈어요. 다른 일을 하던 성이 와서 보고는 살만 남은 부채 어디다 두었냐고 찾았지요. 다 떨어져서 불에 넣어버렸다고 하니 성은 두말 않고 새 부채의 종이를 뜯어냈어요. 멀쩡하던 부채가 거의 다 뜯겨져 살만 남았지요. 그리고는 그 부채로 화롯불을 살살 부치니 불땀이 적당히 일었어요. 물론 약도 잘 달여졌지요. 성의 얍실얍실한 몸 어디에서 저런 지혜가 나올까 생각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더운 날씨에 올레길 걷는 동안 종종 성을 생각하다 밖에 나가서 부채를 하나 사왔어요. 부채 사기가 선풍기 사기보다 더 힘들었어요. 누가 찾지 않으니 만들지도, 팔지도 않아요.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채는 종종 있었으나 별로 바람이 시원하지 않네요. 종이를 발라 만든 부채는 파는 곳이 거의 없어서 관광상품을 파는 데까지 가서 천으로 만든 부채를 하나 샀어요.

   부채질을 하며 무더위를 견디고 있는데 와락 눈물이 나요. 성이 보고 싶었어요. 살만 남은 부채만큼이나 야위어 버린 성이 막 그리워졌지요. 지금 성은 그 때의 할머니만큼 나이가 들었어요. 자식들 떠나보내고 혼자 있는 성에게 그때의 성만큼 나이가 든 나는 살만 남은 부채로 뭉근하게 약 달여바칠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한약방에서 기계로 달여주는 약을 어쩌다 건네드릴 뿐이에요. 성의 나이를 셀 때도 있어요. 정말 할 수 없을 때요.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성의 나이를 잊고 살지요. 성의 나이를 세면 성이 진짜 그만큼 멀리 가 있을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성 나이를 기억하지 않아요.

   성,

   다 낡은 부채가 탕약을 달이는 화롯불을 조절하는 데는 제일 좋았듯이 살만 남은 부채처럼 앙상하게 늙어버린 성이 내겐 가장 좋은 부채예요. 아직 젊어서 확 일고 싶은 급한 성질 눅진하게 주저앉히기도 하고, 미리 늙어서 의욕을 잃고 자신감마저 상실해버린 나를 다시 살살 일으켜주기도 하는 부채지요. 

   성은 내 삶의 불땀을 조절하는 유일한 부채지요. 내 안의 탕약이 잘 달여져 좋은 약이 되게 하는 유일한 부채예요. 그래서 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그립지요.

 

     * 산문집『잘가요 어리광』에서/  2012.6.25 <도서출판 공익사> 발행

     * 김 영/ say-amen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