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2. 12. 21. 01:01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숙자

 

 

   지구는 가슴뿐인 신체다. 그도 처음엔 수족을 갖춘 몸이었겠지만 헤아릴 수 없는 우주 시간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사이 돌출부나 모난 곳이라고는 다 마모되어 한 덩어리 둥근 가슴만 남았으리라. 풍파에 씻기고 깎여 너나없이 닮은꼴 되어버린 해변의 몽돌들, 제아무리 개성파였을지라도 결국 엇비슷한 모습의 노인이 되고 마는 우리네 또한 일생이라는 단 한 번의 공전을 향해 쉬지 않고 자전하는 존재들이다.

 

   나의 공전축도 어느새 기울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뿐사뿐 ‘생각’ 없이 들뛰어도 좋았던 시절의 무릎이야 얼마나 가벼웠던가. 산책로에서 내가 두꺼비를 발견한 건 재작년 봄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할 때,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자니 길섶 비탈진 곳에 들쑥날쑥 심어놓은 조경석(造景石)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고 그 틈에 의젓이 앉아있는 돌-두꺼비 한 마리를 조우하게 됐던 것이다.

 

   몇 년을 두고 걸었던 산책로건만 무릎에 고장이 붙고서야 알아보다니! 모든 일에는 진정 예정된 때가 있음일까. 푸른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에서 무단히 차에 치였던 그날 이후. 자연(自然)이 분만한 돌-두꺼비와 나는 절친한 사이가 됐다. 채석장에서 다량으로 쪼개져 나왔을 화강암인데 또렷한 눈동자와 줄무늬까지가 어찌 그리 선명한지! 그 친구, 오며가며 쓰다듬어주는 건 물론이요 가끔은 군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 발치에 틀어박힌 연두색 비닐이 눈에 띄었다. 게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선뜻 꺼내주지 못한 채 서너 달이 흘렀지만…, 무의식적인 찰나 맨손으로 그걸 빼내고야 말았다. 염려했던 뱀 따위는 나오지 않았고 그건 그저 빈 봉지일 뿐이었다. 나는 늘 휴대하고 다니는 예비 비닐봉지 속에 그 쓰레기를 수습하고는 돌에게 물었다. “너, 시원하지?” 룰 랄 라 다른 쓰레기도 주워 담으며 룰루 랄 라.

 

   그렇게 돌아오는 길. 별의별 쓰레기가 너무 많은 데 놀랐다. 숫제 내 비닐봉지가 모자라 때마침 굴러다니던 흰색 비닐봉지 하나를 주웠는데 거기에도 금세 꽉 찼다. 그게 바로 지난 7월11일. 그로부터 생각을 뒤적이다가 산책로 쓰레기를 열흘에 한 번씩 줍기로 결정/실천 중이다. 평일에는 90분 정도 독서하며 걷지만 그날은 180분 이상 쓰레기를 줍는다. 책 읽기를 허락한 산책로에게 다소나마 보답이 되었으면 싶다.

 

   담배꽁초, 일회용 컵, 사탕 껍데기, 종잇조각, 휴지, 페트병, 캔, 유리병, 면봉…, 턴 지점부터는 무게가 느껴진다(평균 20~30ℓ). 얼마 전엔 쪼그리고 앉아 박살난 박카스 병 쪼가리를 줍고 있는데 “뭘 그렇게 주우세요?” 한 여인이 물었다. “유리조각이에요. 사람은 신발을 신으니까 괜찮지만 개나 고양이는 맨발이라 다칠까봐서요. 비오는 날이면 지렁이도 기어 다니는데 이렇게 줍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기 때문이에요.”

 

   사용하는 집게가 짧다보니 꽁초 하나하나에도 몸을 깊숙이 숙이게 된다. 허리가 뻐근/뻣뻣해질 즈음이면 점점 밝아지는 가로등 아래…, 백 번? 이백 번? 삼백 번? 절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를테면 내 남편도 내 아들도 겨우 살아 숨 쉬는 지구의 가슴에 담배꽁초쯤이야 휙 휙 버릴 터이니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작은 대속과 위안을 마련해준 산책로 친구 돌-두꺼비에게도 ‘고맙구나, 참 고맙구나!’  ▩

 

                                        

  *『행복이 가득한 집』2012.11월호/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