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열다
최정애
꽃잎이 움트던 지난 봄날, 후배 시인의 병문안을 갔었다. 완쾌하여 시를 쓰기까지는 몇 달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정신만으로도 할 수 없고 육체만으로도 할 수 없음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 여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며 꿈을 성취하는 기본 요소이다.
삶은 늘 편한 것만은 아니다. 바람 한 줄기가 미로를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오는 것처럼 시간마다 설렘을 동반한다. 아무 것도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끙끙대며 밤잠을 설칠 때가 있다. 고민 속에서 완성한 글이 아침을 맞아 줄 때면 마치 쌔근대며 잠자는 자식을 내려다보는 심정이다. 내 혼이 깃들고 정성과 사랑이 흠뻑 배어 있는 글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낀다면 그날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영구한 것이 없다. 어제 새소리이던 것이 오늘 바람이 되어 흩날리고 오늘 꽃이던 것이 내일 흙이 되어 묻히게 된다. 세상은 그 속으로 나를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다.
낙엽 한 번 밟는 사이 겨울이 찾아오고 복사꽃 한 번 쳐다보는 사이 봄이 가 버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내가 제대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못하는 틈새로 계절은 수시로 바뀌어진다. 그림자 어른대는 사잇길로 나는 나에게서 너무 멀어지고 있다. 내 있는 자리를 꽉 잡고 있는데도 매일 내 위치에서 조금씩 이탈한다.
새 한 마리가 렌즈 속에 정지해 있지만 그 새는 날고 있다. 누구의 시선에 붙잡혀 있지만 고도 55피트의 기류와 제 날개가 싸우고 있다. 마치 내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니듯 설익은 문장들과 함께 무작정 가고 있다. 합리적인 사고와 아이러니를 양육하려고 새처럼 날갯짓을 한다.
나는 매일 내 그림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싸운다. 키를 재며 싸우고 몸통을 늘리며 싸운다. 그림자는 나의 예술품이다.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벼랑길이든 철길이든 겁 없이 따라 다니는 나의 동반자이다.
오늘도 내 그림자는 수평 위를 걸어간다. 돌출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허공이나 구름 위를 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오라 해도 오지 않고 가라 해도 가지 않는 까다로운, 그 그림자의 만만함을 좋아하고 또한 그 오만함이 있어 그를 무시할 수 없다.
내가 그림자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어두운 살 속에 박힌 꿈을 언어로서 대변해 주는 일이다.
그림자는 단 한 번도 나를 이탈하거나 돌아선 적이 없다. 온 몸을 세상에 맡기지만 결코 흔들거리지 않는다. 바람 때문에, 빗물 때문에 그 결이 거칠어질 뿐이다.
오늘도 내 그림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내가 쓴 글을 수없이 수정하듯, 긁히고 패인 자국을 구석구석 수선해주겠노라고 …….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델로 살게 하리라고…….
내 그림자에게 유쾌한 상상을 열어주고 있다.
* 에세이집 『그림자를 열다』에서/ 2012.5.3 <도서출판 고요아침> 발행
* 최정애/ 강원도 강릉 출생, 1998《수필과 비평》수필 등단, 2002년『시현실』로 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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