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중국, 늦은 조문 - 윤동주 생가/ 최금녀

검지 정숙자 2012. 9. 18. 01:37

 

 

     중국, 늦은 조문 - 윤동주 생가

 

        최금녀

 

 

  콧날 바른 그의 나이 스물여덟, 슬픔이 넘실거린다. 가슴이 저려온다. 그의 시「서시」를 읽을 때도, 자화상」을 읽을 때도, 「별 헤는 밤」을 읽을 때도 그의 청춘이 아프다. 잘 벼린 한 자루 비수같이 푸르게 살다 간 시인 윤동주, 그를 찾아 용정으로 간다.

 

  아깝고 쓰린 그의 죽음, 1945년 후쿠오카 감옥이 떠오른다. 시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늦은 주문 간다. 그의 시(詩)와 반일, 그 맑고 잘 생긴 청년의 유년 시절, 동주 - 일주 - 광주 - 혜원 3남 1녀의 장남으로서 그가 다니던 학교, 오솔길의 나무들을 만나러 간다. 사랑한다는 말 전하러 간다. 그의 동네, 그의 집, 그의 영혼에 절 올리러 간다. 그의 시 읊조리며,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 유정함과 비감이 앞에 선다.

  두만강 건너 연길시, 용정, 명동촌, 윤동주 생가로 간다.

 

  심양 비행장 12시 30분. 인천 출발, 한 시간 반 지나 김포공항 비슷한 공항에 내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에어컨이 없어 찜통이었던 심양, 어느새 있을 것은 다 갖추었다. 빠른 템포다. 청사 안은 온통 빨간 글씨다. 이제는 무덤덤해진 빨간색. 마중을 나온 안내인이 남의 속도 모르고 빨간색은 황실에서만 쓸 수 있는 색이었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쓰고 있으니 황감하다는 뜻인지, 좋은 세상이 되었다는 건지.

  비행기 속에서도 공항에 내려서도 윤동주를 생각한다. 걸음걸음 생각한다. 조상 파평윤씨들을 생각한다. 함북 회령에서 육로로 이동했을까?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심정은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염천이었을까. 며칠이나 걸렸을까. 조상의 뼈 묻힌 땅을 어찌 떠났을까. 시인 윤동주를 세운 파평윤씨 가문.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분간되지 않는 얼굴들, 기후도 땅도 생김새도 우리와 구별되지 않는 나라, 병자호란 때 선양으로 끌려간 60만 조선인의 핏줄이 이어지고 있는 땅, 조선말을 하는 조선족이 중국이 조국이라고 얼버무리는 땅, 남의 땅 같지 않은 땅에 왔다. 개운치 않다.

  본래 고구려도 발해도 우리 땅이라고 배우는 게 아니었다.

  박제천 시인이 백호(白糊) 임제(林梯)의 마지막 유언을 작품화한 시가 생각난다.

 

      내가 죽거든 소리내어 울지 마라

     이 조그마한 땅에서조차 활개를 쳐보지 못한 신세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금은 남의 임금에게 머리를 숙이고

     땅이란 땅은 죄다 남에게 먹힌 채

     겨우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 주저앉았으니

     그러고도

     울음이 남아돈다면 사람의 할 짓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박제천, 「 백호(白糊)」전문

 

  심양은 국제공항이다. 인구 740만, 교민 수는 23만 명, 중국 소수민족 10개 중 200만 조선인, 한국 기업이 삼천 개나 된다.

  1945년 봉천을 심양이라고 개명했다. 원래는 천왕에게 바친다는 뜻이었다고. 

  시인 윤동주를 찾아가는 길, 심양에서 하차했다. 퀴퀴하고 음험한 고궁을 슬쩍슬쩍 들여다보았다. 안내인은 달갑지도 않은 심양을 설명하면서 우월감이라도 있는지 신바람이 난다. 심양은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윤동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 시간만 까먹는다. 혹시나 윤동주가 섞인 말이 나오지 않나 귀를 기울이지만, 돌보지 않은 흉측한 궁을 자랑하기에만 바빴다. 그들이 시인을 알겠는가.

  더위 속에서 우리들은 명청의 역사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윤동주 님 덕분에 팔자에 없는 발마사지도 받았다. 황제의 느끼한 체취도 맡았다. 몽골의 공주 같은 호강이라 해둔다. 윤동주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은 떨림이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도 봉림대군도 울면서 건너간, 이웃사촌인 나라, 사촌은 남의 시초라 했던가.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 요즘은 우리 신문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라. 아무리 생각해도 걸림돌 같은 나라.

  아무개 황제는 후궁을 4명까지 두었다고 안내인이 객설한다. 흥, 겨우 그 정도라니, 우리는 삼천 궁녀도 거느렸었다.

  우리에게 인해전술이라는 전법을 알려준 중국은, 2008년 8월 올림픽을 개최했다. 어느새 프랑스 에펠탑보다 더 요란한 조명을 걸어놓을 줄 안다.

  윤동주 만나러 가는 길은 일급로라고 했다. 일급로가 오장을 들볶는다. 관급 부실공사 때문이라고. 안내인은 이웃집 얘기하듯 그런 일은 매우 흔하다고 자랑한다.

  송화강, 흑룡강을 지난다. 흑룡강을 지나 벌판을 달려간다. 말 달리던 '선구자'의 벌판이 이곳이 아닐까. 눈을 감고 부르는 노래, <선구자>의 가사가 떠오른다.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노래의 현장엘 간다.

  그때 밖을 내다보던 일행 중 누군가 해란강이라고 소리친다.

 

 

      마음 속에 사모하던 강,

     꿈에서도 못 잊은 그 얼굴이다

     젖꼭지 말라붙은 지 오래되었는지

     강도 아니고 개울도 아닌 해란강

     그새 그렇게 늙어버렸다니

     그렇구나

     첫사랑은 만나는 게 아니구나

 

  연길시, 43만 명, 조선족이 제일 많다. 허름한 사람들과 남루한 거리와 집을 보면, 입 하나 덜려고 자식 하나는 남의 집에 보내고, 두고두고 눈물을 쏟은 그 자식, 그 자식을 만난 듯 연민이 일어난다. 우리를 누구라고 알고 있을지, 왜 같은 말을 쓰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을 참는다.

  용정시에 도착하니 차와 사람이 범벅이다. 지킬 신호가 없다. 수레를 끄는 소가 용변을 보며 지나간다. 보통이다. 받침 틀린 간판에도 가슴이 쓰리다.

  용정 명동촌이 가까워온다. 시인이 자주 들여다본 그 우물을 보러 간다. 윤동주에게 늦은 조문 가는 길목에 한 우물이 있었더란다. 그래서 용정이란다.

  옛날 옛날 한 옛날, 용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는 지금은 말라 흔적만 남아 있는 우물터. 부실공사로 털털거리는 길로 우물터 지나, 옥수수밭 지나, 벌판 지난다. 윤동주에게로 간다. 짠하고 애달픈 마음으로 간다.

  조선족은 지금도 벼농사밖에 지을 줄 모른다는 기분 나쁜 설명을 들으면서 간다.

 

  황토 흙길 걸어 생가에 도착했다. 아니 '윤동주 생가'라 쓴 돌 앞에 도착했다. 굵은 붓으로 써놓은 그의 이름 앞에서 어떻게 예를 표해야 하나. 절을 해야 하나. 우리 선조들은 오랜만에 해후하면 맞절을 했다는데. 자식이 오랫동안 집을 나갔다 와서도, 어버이가 먼 길 다녀오셔도 큰 절 드렸다는데.

 

  시원한 글씨체, 답답한 속이 후련해진다.

  복원된 일자 기와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황토 흙벽이다. 듬성듬성 자란 풀이 빈 집의 주인이다. 무표정하다. 생가란 본래 무표정이 주인인가. 무표정이 허전하다.

  그의 영혼이 먼 길 온 우리를 기뻐하고 있을지도, 이제라도 왔으니 고맙다고 할지도.

  일자 기와집 마루에 걸터앉아본다. 책가방 들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윤동주를, 부엌 쪽으로 가는 윤동주를, 연희전문 교모를 쓴 윤동주를 본다. 일본으로 유학 가지 말라고 손사래치는 어머니도 보인다. 한사코 떠나는 윤동주가 보인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어머니 그리워 눈물짓는 윤동주가 보인다. 남향 바른 묘소에서 나와 햇볕바라기를 하는 윤동주가 보인다.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는 윤동주가 보인다….

  역사박물관이라 이름 붙은 자그마한 방. 어린 시절의 그와 외삼촌 이낙연 목사와 문익환 목사와 교우들 사진, 기록, 책자가 있었다. 볼수록 아까운 사진 속의 잘 생긴 이목구비.

  그곳에는 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조선말이 육친같이 느껴진다. 그들 중 아무라도 붙잡고 이 집 좀 잘 지켜주세요 부탁한다.

  산 정상에 서린 눈같이 고귀하고 깨끗한 그 영혼 앞에 모자라는 시 한 편 지어 올렸다.

 

 

     '윤동주 생가'라 쓴

     먹물 글씨 앞에 못박히어

     조용히 불러 본다

     '윤동주'

     생전에는 이루지 못한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아직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고

 

     그가 들여다본 우물 말라

     뚜껑 덮여 있고

    

     사는 이 없는

     황토 흙벽 그의 생가

 

     그가 무덤에서 내려와도

     반기는 이 없어

     수줍어 돌아갈 영혼

 

     윤동주 이 사람을 본 적 있나요?

 

     동네 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스물여덟 조선의 청년이

     꿈을 키우던

     이 집 좀 잘 지켜주세요

 

 

         윤동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서시」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참회록」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

 

  그의 묘소는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별이 잘 올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다.

  여름날 밤, 불꽃을 내며 맹렬한 속력으로 생애를 불태우고 이곳에 떨어져 화석이 된 시인 윤동주, 밤마다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바라보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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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길 위에 시간을 묻다』에서 / 2012.8.31 <문학세계사> 펴냄

 (※ 이 시집 속 '산문' 파트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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