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시간과의 사투/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2. 7. 12. 01:46

 

  

    시간과의 사투

 

      정숙자

 

 

   자꾸 헐거워진다. 이러다간 뚜껑 열리고 말겠다. 소중히 담아둔 것 다 날아가 버리거나 쏟아지거나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말겠다. 덜컥! ‘나의 화두’라니, ‘내 시의 키워드’라니. 이건 직격으로 들어온 질문이 아닌가. ‘당신의 인생에서 화두는 무엇이냐, 당신의 문학에서 키워드는 무엇이냐?’ 어디 좀 내놔보라는 것 아닌가. 어리보기로 살아온 나로서는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곰곰 되짚어보니 열심히 산답시고 매순간 손바닥/발바닥 끝에 돋아난 깃털 스무 개를 연신 꼼지락거렸지만, 나는 아무리 털어도 건질 것 없는 깜부기에 불과하다. 이런 터수에 ‘나의 화두는 이것’, ‘내 시의 키워드는 이것’이라고 답변할 자격 자체가 저쪽에 있음이다. 진즉 화두와 키워드를 영혼 깊숙이 타투하고 살아왔다면 나날이 희어지는 머리털이 이토록 푸석하진 않았을 것을.

   왜 그래야 된다는 당위성도 없이 부단히 헤엄쳐온 (삶의-문학의) 난바다에서 그나마 놓치지 않으려 애쓴 게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고무줄놀이와 핀치기, 사방치기에서 벗어나고부터는 시간이라는 골동품을, 아니 신상품이기도 한 ‘시간’을 노상 아끼며 간수해왔던 것 같다.

   시간은 천지만물의 맨 앞에 위치한다. 흔히 시간과 공간을 아울러 ‘공시(空時)’ 아닌 ‘시공(時空)’이라 하지 않던가. 시간이야말로 자연의 위용이며 위력이다. 존재 혹은 비존재의 흔들림까지도 시간 안에 거주한다. 시간은 어느 특정 대상에 따라 빨라지거나 느려지지 않으며 넓어지거나 좁아지지 않으며 밝아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시간은 만인 앞에 평등하고 영원하며 또한 과묵하다.

   그런 시간을 함부로 대하거나 내박친다면 시간 또한 그 장본인을 함부로 대하거나 내박칠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어느 누구한테도 충고하지 않을 뿐더러 회유하지도 않는다.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는 후히 보상하고 ‘띵까띵~ 띵까띵~’ 밟아버리는 자에게는 한 푼의 값어치도 남겨주지 않는 시간. 시간. 시간.

   그러므로 시간은 인과론적 차원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제아무리 꼼수 100단의 사기꾼일지라도 (자신과 이웃을 속일지언정) 시간을 속일 순 없다. 만일 어떤 이가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한 인격을 이미지화 해보시오-지시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시간 같은 분’이라고 축약할 것이다. 시간은 느긋하고 정확하며, 꽉 찼지만 텅 비었고, 자애로우면서도 가차 없다. 하늘 아래 어떤 사물과 정신에도 시간 같은 건 없다. 완벽이라는 말보다 더 완벽한 어휘가 실재한다면 나는 단연코 ‘시간’ 앞에 그 파롤을 수식할 것이다. 이슬만도 못한 한 쪼가리 서생이 시간을 두고 횡야설수야설 주워섬기다니! 지그시 웃음 짓는 시간, 우주와 빛의 팽창 이전부터 자신을 개방한 시간의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풀려나오고 보니 나도 뭐 아주 화두와 키워드 없이 살아온 파치는 아닌 성싶다. 독자 제현께서도 이미 거니채셨겠지만, 오늘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심급은 시간이다. 좋은 시 한 편을 쓰는 게 목표라고 말뚝 세웠으나 기실 그 소망에 닿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시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시간 가운데서도 사적인 시간을 획득하고서야 ‘시’의 시옷자 한 획이라도 그려볼 수 있지 않은가.

   상상력으로의 진입→이미지 설정→초고 건지기→치밀한 퇴고→환상 덧씌우기→제목 발굴하기→완결성 점검을 거친 후에야 탄생하는 한 편 한 편의 시들. 음풍농월에 그칠 수 없는 현대의 시야말로 예각을 다투는 구조와 심안(心眼), 그리고 투혼의 산물이다. ‘시’라는 기계의 메커니즘을 습득해야 하고 남다른 개성을 펴보여야 하는 트랙 위의 나날들. 시인에게 시간보다 급한 화두와 키워드가 무엇이리오.

   일정 수입 안에서 저축통장의 잔고를 불리려면 덜 먹고, 덜 입고, 덜 쓰는 길밖에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24시간 안에서 내 시간을 만들고 모으려면 덜 자고, 덜 나다니고, 덜 멋 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내핍경제/내핍시간을 하는 목적은 단 하나, 적재적소에 쓰기 위해서다. 시간과 돈의 ‘씀씀이’ 참으로 묘한 중첩이로군.

   나이가 많아질수록 개개인의 지구는 작아진다. 그에 따라 자전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여 나 역시 쌩떽쥐베리가 발명해낸『어린왕자』의 ‘가로등지기의 별’에 전입신고자가 되고 말았다. 가로등을 ‘켰다-껐다’하는 사이 하루하루가 날아간다. 쇠못이 지남철에 머리를 들이밀듯이 시간에 매달려야만 한다. 시간이 ‘일차 원고지’라는 점을 시시각각 숙지해야만 한다.

   그로 인해 나는 많은 즐거움을 포기했다. 옛 친구와의 만남이나 마음을 나눠야 할 이웃들, 자식들과의 왕래마저도 통제한 지 오래다. 지척에 사는 아들집에 다녀온 지도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번번이 닥치는 명절이나 식구들의 생일도 (온 가족이) 외식으로 때운다. 그게 다 시간을 잡는 일이기에, 시인이라는 나, 젊은 시절에는 부모님께 시간을 아꼈던 나-개인주의자는 보편적인 어머니, 할머니, 친구, 이웃, 아내에서도 열외 되었다. 그리고, 그러나,

   그 분들께 용서를 비는 마음만은 하늘 깊숙이 새겨두었다. 특히 가족한테는 미안하고 미안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머리 숙이는 진짜 요인은 시간을 아꼈다/아낀다는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작품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울지고 있는 꽃다운 시간, 다시 얻을 수 없는 지구에서의 일회성 기회를 피붙이와, 벗과 더불어 웃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고독의 열락에 빠지는 짐승에게 ‘예술가’라는 호칭은 너무나도 과분하고 혹은 슬프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에도 바쁜 이 사회에서 예술은 여잉(餘剩)일 수도 빛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예술가는 자아 선택이 아니고 신의 호명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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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플러스』2012-여름호(3호), 기획 에세이[ 나의 화두, 내 시의 키워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외, 산문집 『밝은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