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daum->
<추억 에세이></추억>
뿌리 불러오기
황희순
사람들은 왜 처음 만나면 고향이 어딘지 궁금해 할까. 고향을 뿌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프로이드는, 아동의 초기 경험이 정서 발달에 큰 영향을 주며 사회성과 성격이 형성됨을 주장했으니, 어느 곳에서 어떤 물을 먹고 자랐는지를 알면 그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용궁이라고 말한다. 대청댐이 만들어짐으로 내 고향은 뒷동산까지 수몰되었으니 용궁, 맞다.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 법수리’는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졌고 사람들은 온갖 사연을 보퉁이에 싸들고 뿔뿔이 흩어졌다. 용궁이 되기 전 고향의 기억을 불러오면 물속에 잠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기도 하고 오래된 앨범 속 사진처럼 뒤엉켜 있다. 계절은 쉼 없이 오고 가도 내 기억 속 계절은 멈추어 있다. 멈춘 계절마다 한끝을 잡아 살짝 당겨본다.
봄
땅꼬마 영미는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당고모였다. 또래였으므로 어릴 땐 만만한 친구였다. 햇살 소복하게 내려앉은 토담 아래 영미와 봉숭아물을 들이고 매일매일 차리던 소꿉살림은 동화의 한 컷처럼 떠오르는 추억이다. 얼마나 열심히 소꿉놀이를 했는지 깨진 사기그릇을 동그랗게 다듬어 가지고 놀다 다친 흉터가 지금도 손목에 남아있다. 유채꽃이나 쑥을 뜯어 반찬을 만들고, 광에 몰래 들어가 조막손으로 쌀을 한줌 집어다 밥을 지어 홀홀 먹는 시늉을 했다. 마른 호박잎을 비벼 종이에 말아 담배 피우는 할머니 흉내를 내기도 했다. 막걸리 거르고 남은 술찌끼에 당원을 섞어 먹으면 참 맛있었다. 영미와 그걸 먹고 툇마루에서 낮잠을 잔 기억이 있는데 깜빡 취했던 거 같다.
그때는 밀주 담그는 걸 감시하는 산감(산림감시원)이 있었다. 산감이 떴다는 말이 돌면 나는 밀주단지를 숨기느라 허둥대는 할머니 치마꼬리를 붙잡고 울며불며 지청구 먹으며 따라다녔다. 산감은 도깨비나 공산당처럼 뿔이 났거나 무시무시한 괴물같이 생겨서 밀주 담근 집 사람을 다 잡아가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밀주단지는 부엌 나뭇간 구덩이에 숨기고 천장까지 나무를 수북하게 쌓아놓았다. 나는 소꿉놀이도 잊고 나뭇간에 신경을 쓰며 오도카니 마루 끝에 앉아 산감을 기다렸다. 영미는 내가 울 때도 항상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모르는 아저씨가 왔다 가긴 했어도 뿔이 났거나 무서운 괴물은 본 적 없으므로, 아무도 잡아가지 않았으므로 산감은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고 마음을 놓곤 했다.
여름
‘법수’는 회덕 황가 집성촌이어서 또래거나 두서너 살 많은 아재뻘이 여럿 있었다. 나는 그 아재들이 작당하여 닭서리하는 데를 따라갔다. 나야 처음 하는 거였지만 서리는 그때 흔하디흔한 장난이었다. 수배는 몸집이 작고 날렵한 또래인데 전위대 공격수였다. 휘영청 뜬 달이 지길 기다렸다. 달이 지자마자 수배가 송씨네 안마당 닭집 문을 살금살금 열고 들어간 후 뭘 잘 못했는지 닭들이 푸드득거리고 난리가 났다. 송씨가 휘적휘적 나와 삐끔 열린 닭장 문을 철크덕 걸어버리더니 여기저기 살피며 돌아다녔다. 수배가 끽 소리도 못 하고 갇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웃동네에 어떤 사람이 닭서리하다 들켜 족제비가 물어간 닭까지 몽땅 물어주었다는 소문도 있으니 정말로 큰일이었다. 도망도 못 가고 모두 숨을 죽이고 울타리에 바싹 붙어 있었다. 송씨가 방에 들어가고 한참 지나 수경 아재가 살금살금 접근해 닭장 문을 열어주었다. 수배가 닭 한 마리 모가지를 틀어쥐고 나왔다. 그날 밤 제일로 맛있는 닭다리는 내 차지였다.
어떤 날은 송씨네 과수원에서 포도를 한 자루 따오기도 했는데 나랑 은선이 바람잡이였다. 우리가 포도 얻어먹으러 놀러온 척 송씨를 붙잡아놓고 히히덕거리는 사이 아재들이 포도서리를 했던 것이다. 송씨는 타성바지라 간혹 황가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 참외나 수박서리는 일도 아니었고, 어느 해 여름에는 이웃동네 감자를 한 이랑이나 뒤져다가 삶아먹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를 넘은 도둑질이었다. 대전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주말이나 방학 때 집에 가면 농사짓는 아재들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그렇게 담을 키워줬다.
가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대전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즈음 아버지는 자식들을 공부시킨다는 핑계로 대전에 사는 과수댁을 곁에 두었다. 그리하여 부모님은 매일 전쟁이었다. 수십 년 후, 그런저런 기억이 이런 시를 낳았다.
가랑잎 쌓인 산책길/새털 몇 잎 흩어져 있다//그날, 콩마당질하던 해질녘, 아버지의 여자 때문에, 머리채 뒤잡혀 사립문 밖으로 끌려 나간 언니, 나뒹굴던 마당귀, 감나무 밑, 홍시 짓뭉개져 있던 거기, 한 움큼 뽑힌 머리카락, 콩깍지 밟듯 밟고 서있던 아버지, 등뒤, 풀썩 쓰러지던 어머니, 그림자, 흰 고무신 한짝 뒤집혀 있던, 그 자리,//간밤, 새들에게/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새가 날아간 자리」 전문(졸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에서)</새가>
언니는 가출하고 엄마는 매일 앓았다. 집을 떠나 아버지의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된 나는 친구도 없이 공부만 했다. 그때의 기억이 또 이런 시를 낳았다.
…(상략)… 오갈 데 없는 나는 야릇한 소리에 귀를 쑤시며 연탄가스 풍기는 부엌바닥에 빨래판을 깔고 앉아 영어단어를 소리 내며 외웠다. 엄마가 생각날 때면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그릇그릇 넘치게 채웠다. 그 여자는 눈을 흘기며, 니 애비 땜에 내 신세 조졌다, 물 좀 그만 퍼오라, 화풀이를 해댔다. 두레박 잡은 손에 물집이 생겨도 우물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의 불목하니였다. 우물에 간 그 여자가 늦으면 우물귀신이 잡아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 해 겨울, 언니에게 머리끄덩이 뒤잡힌 그 여자는 팔삭둥이 이복동생을 낳았고 나는 쫓겨났다. 쫓겨나며 다 엎질러졌다. 엎질러진 채 아직도 세상을 쫓겨다니고 있다..
―「신세 조진 그 여자」 부분(졸시집 <새가 날아간 자< />PAN>리>에서)
내 안에 또 하나의 내가 자라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삶의 평화가 깨진 거 같다. 열세 살 꼬맹이가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살기 시작한 그때부터 칙칙한 그림자가 내 뒤를 줄곧 따라다녔다.
겨울
밑도 끝도 없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네가 물바다가 된다는 거였다. 1975년 대청댐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 말이 돌았던 거 같다. 완공되기 4∼5년 전부터 한두 가구씩 이사를 갔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한 동네 사람들은 쓰다달다 말 한마디 못 하고 쥐꼬리만한 보상금으로 살 궁리를 하느라 인심이 흉흉해졌다. 소작농들은 살 길이 더더욱 막막했다. 요즘 사람들처럼 머리띠 두르고 시위할 줄도 몰랐다. 소작인이던 승서 대부는 한집 한집 떠날 때마다 이삿짐 챙겨주고 술에 취한 입을 꾹 다문 채 골목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농약을 들이켰다. 꼭대기집 타성바지 종미 할매는 바람난 아들 믿고 도시에 가서 얹혀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목을 맸다. 동네는 점점 쑥대밭이 되어갔다. 달걀귀신이 뒤꿈치를 깨물 것 같아 뒷걸음질 치면서도 죽어라 싸돌아다니던 골목은 정적이 감돌았다. 면직원들은 재촉하듯 이사 갈 날짜를 받아갔다. 그들은 이사하기가 무섭게 빈집을 쳐부수고, 가져갈 수 없어 두고 간 큰 항아리들을 마구 깨트리며 돌아다니는 바람에 간장냄새가 온 동네를 진동시켰다. 바디울할아버지는 동네가 다 들썩이도록 “이눔덜아, 워디 가서 살란 말여!” 고함을 질러댔다.
1980년, 우리 집이 대전으로 이사를 왔으니 벌써 30년이 넘었다. 나는 그즈음 출가해 이사하는 걸 못 보았지만, 트럭에 살림을 모두 옮겨 싣고 아버지가 손수 집에 불을 붙였다는 말을 동생에게 전해 들었다.
에필로그
삶은 늘 왜 아픈 기억을 몰고 오는 것일까. 아픈 시작점을 파고들다 보면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럴 때, 딱 죽어버리고 싶을 때, 생각이 생각을 물고 쫓고 쫓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고향의 호숫가에 서있다. 끊어진 길 끝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목청껏 부르다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 문학의 뿌리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별을 보았던 수몰된 고향이다. 그곳에서 움튼 나의 시(詩)는, 승서 대부와 종미 할매의 죽음, 엄마와 언니의 아픔, 열세 살 이후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칙칙한 그림자를 뚫고 피어난 꽃이다.
※대청댐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과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사이의 금강 본류를 가로지른 댐이다. 1975년 3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81년 6월 완공되었다. 금강 하구로부터 150㎞ 상류지점인 대전광역시 동북방 16km, 청주시 남방 16㎞ 지점에 위치해 있다. 대청댐으로 생긴 대청호는 저수량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소양호와 충주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호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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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
충북 보은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새가 날아간 자리』 외 2권
_____<시에> 2012. 여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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