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복
정숙자
벌써 3주째. 목욕 때마다 마주치는 녀석이 있다. 녀석, 몸통은 어찌 됐는지 가늘고 긴 다리들만이 흰 타일벽에 붙어 종종걸음을 친다. (연갈색의)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하도 날렵하고 가벼워 기는 게 아니라 저절로 미끄러진다고 해야 옳을 정도다. 나는 온몸에 거품을 문지르며, 양치질을 하며, 물을 끼얹으며 너무나도 연약한 그에게 마음을 쓴다.
지금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기. 이 깡마른 비탈에서 그는 무엇을 먹고 자며 행선지가 어디이기에 그리도 총총히 내달리는 것인지…, 그에게도 부모형제가 있는지, 믿고 의지할 친구는 있는지…. 햇빛과 풀이 싱싱한 계절이라면 그를 종잇장에 기어오르게 하여 창밖으로 해방시켜 주련만, 날개와 가슴이 없어 곤충 축에도 들지 못하는 그.
거미강 거미목(Araneida, Araneae)에 속하는 절지동물이라지만 실을 뽑아낼 복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살짝만 건드려도 치명상을 입게 될 숙명적 약질이 저토록 열심히 살고 있다니! 허술한 우리 욕실이 그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와 함께 이 겨울을 넘기리라. 그는 내 발가벗은 몸을 봤다고 키득키득 소문내지도 않을 터(이므로).
파충류(개구리 제외)나 쥐, 모기, 등에, 파리 따위가 아니라면 딱히 친구가 되지 못할 까닭도 없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기에 웬만한 동식물과는 친분이 돈독하다. 내 딸과 손녀들은 수돗물만 먹고 자라 나비나 풀무치, 매미를 보고도 ‘벌레’라고 소리치며 몸에 붙을까봐 기겁을 한다. 심지어 죽은 매미를 주워놨다가 “이~ 이~” 눈앞에 들이대면 새빨갛던 울음도 뚝 그친다. 시골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은 지구의 겉만을 아는 셈이다.
어쨌든 나는 홀로 때를 밀며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에 낯을 익힌 처지이니 말이다. 내생에서든 금생이든 그가 ‘복’ 받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래(來)자와 복(福)자를 골랐다. ‘래복!’ 괜찮다.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간혹 누군가의 복을 빌어준 적이 있는데 그 기도가 헛되지 않음을 지켜봐왔다. 사심 없는, 진정어린 축복이란 어느 바람을 타고서라도 하늘에 이르러 기대 이상으로 꽃 피고 가지 뻗고 열매 맺는 법.
그렇지만 나에게도 고치고 싶은 회한이 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될 무렵, 예쁜 것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날갯짓을 시작하던 바로 그 해. 아버지는 해빙(解氷)이 되자마자 새끼돼지* 두 마리를 사오셨다. 한 마리보다는 두 마리를 키워야 서로 더 먹으려고 꿀꿀거리며 생기발랄 잘 자라기 때문이었다. 흔히 돼지는 아무 감정도 없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어미 품을 떠나온 어린것이 아닌가, 한참은 지나야 입맛을 잡고 활발해진다.
어머니는 걔네들이 온 첫날부터 먹잇감에 각별히 신경 썼다. 하지만 한 마리가 몹시 힘들어했다. 식욕을 잃고 시름시름 여위어갔다. 어머니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하고 돼지막의 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두었다. 그러나 분홍빛 새끼돼지는 겨우 양지쪽을 찾아가 힘없이 드러누울 뿐 눈조차 뜨기 싫어했다. 그런데 말이다! 그 새끼돼지가 내 그림자만 비치면, 목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 꿀꿀대며 되똑되똑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새끼돼지가 왠지 무섭기도 했거니와 싫고 또 창피했다. 마루에서 내려서기가 무섭게 쫓아와서는 발부리에 얹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언니, 동생 온 식구를 다 놔두고 왜 유독 나를 (알아보고) 따라붙는 것인지. 그럴 때마다 언니와 동생은 깔깔 웃었고, 부모님께서도 “이상한 일이다. 돼지가 너를 좋아하는가보다”라고 거들었다. <하필 병들고 더러운 돼지새끼가 소리까지 지르며 왜 나를 따라다니는 것일까, 나를…?>
정말이지 예쁜 것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날갯짓을 시작하던 바로 그 무렵의 나로서는 새끼돼지의 ‘알아봄’이 싫기만 했다. 변소엘 가면 변소로, 대문 밖을 나서면 대문 밖까지…, 어디든 꿀꿀거리며 졸래졸래 따라나섰기에 잽싸게 대문을 닫아버리고 동산에 오르기도 했다. 바람을 쐬고 돌아오면 어느새 알아듣고 또 달려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면 나는 쿵쾅대는 가슴으로 재빨리 도망쳐 새끼돼지에겐 어림없는 마루에 뛰어오르곤 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새끼돼지가 죽었다. 너무 어린데다가 가엾기 때문이었는지 부모님께서는 그를 삶지 않고 땅에 묻어주었다. 새끼돼지를 사는 데 들어간 돈과 그 해 돼지에게 걸었던 희망도 함께 묻은 셈이었다. 그가 막상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 마음 한구석에선 예상치 못했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 그 감정이 슬픔에 속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그 기억이 희미해지기는커녕 점차 뚜렷하게 고정되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등을 돌리는 행위는 금수(禽獸)만도 못한 일이다. 특히 물질이 아니라 마음만 베풀면 되는 경우에조차 의리를 저버린다면 그는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하물며 어미 품에서 끌려 나왔을 새끼돼지의 울음소리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내 지난날은 육십 평생을 통틀어 가장 몹쓸 짓이었다. 세월이 깊어질수록 나를 따랐던 그 새끼돼지의 애처로운 모습과 꿀꿀대던 울음소리가 슬픔으로 작동한다.
‘어리다’는 경험이나 생각이 부족한 데서 오는 ‘어리석음’을 내포한다. 굳이 이런 가외소리를 적는 이유는 돌이킬 수 없는 내 과오 끝에 덧대는 중얼거림이다. 그때 새끼돼지에게 얕은 인정이라도 베풀었더라면 후회 또한 얇았을 것을…. 병들면 누구나 초라하고 추해진다. 눈가엔 곱이 끼고, 털빛은 윤기를 잃어 뻣뻣하고, 뱃구레와 엉덩이엔 똥과 오줌이 들러붙은 채 죽어간 아기돼지에게. 이 글은, 진심으로 간구하는 용서이며 참회록이다.
내가 깔개에 앉아 머리 감고 발바닥을 헹구는 사이 래복은 상하좌우 맹렬히 벽을 탄다.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육체이지만 무엇 하나 모자라거나 잉여가 없어 보인다. 일사불란한 다리들의 민첩성과 확신에 찬 가벼움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종(種)이야 다르지만 같은 시공을 호흡하는 우리는 지구동창생일진대.
돼지인들 어찌 나름의 꿈이 없었겠는가. 힘없는 동물로 태어났기에 (나 같은 사람의 사랑마저 받지 못하고, 아니 외면당하고) 무참히 숨진 것이다. 문득 그에게도 ‘래복’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리란 생각이 든다. 불가(佛家)의 인연설대로라면 돼지-래복은 이미 재생하여 마흔대여섯이 되었겠지만 늦복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므로 이제라도 그리 불러야겠다.
일생을 건너자면 별의별 만남과 헤어짐을 겪게 마련이다. 엎치락뒤치락 붉으락푸르락 절망과 허무가 가로놓이기도 한다. 돼지-래복과 나는 어느 하늘에서 만난 누구였을까? 그는 나를 알아봤건만 나는 왜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왜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일까? 거미-래복은 과연 얼마 동안이나 우리 욕실에 머물러줄까? ▩
* 원래 돼지의 명칭은 ‘돝’이었으며 ‘돼지’, '도야지'는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등과 같이 새끼를 일컫는 용어였다. 그런데 고어(古語)인 ‘돝’이 사어(死語)가 되면서 ‘돼지’가 돼지 전체를 아우르는 표준어로 바뀌었고 ‘도야지’는 방언으로 남았다. 또한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등과 대등한 의미로는 ‘새끼돼지’가 쓰이게 되었다. 《Daum검색/영주시민신문332호/‘바로알고바로쓰는우리말글살이(24)돼지》참조.
*『시에』2012-봄호/ 추억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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