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항아리부터 깨라/ 강기옥

검지 정숙자 2021. 5. 18. 12:41

 

    항아리부터 깨라

 

    강기옥/ 시인, 본지 편집주간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대감집 뒤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담장과 지붕은 물론 장독대의 항아리도 오르내리며 놀이를 즐기는 사이 한 아이가 항아리에 빠졌다. 어른 키만 한 항아리에 올라 숨을 곳을 찾다 그만 미끄러진 것이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 안에서 아이는 허우적거렸다. 어른들이 달려오더니 주변의 사다리와 밧줄을 집어던졌으나 아이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그 순간 한 아이가 힘에 부치는 돌덩이를 들고 오더니 이내 항아리를 내리쳤다. 철옹성 같던 항아리가 순식간에 깨지고 속 깊던 물은 바닥으로 쏟아져 담장 옆으로 흘러내렸다. 어른들은 만류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돌을 던진 아이는 항아리 속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중국 3대 역사서의 하나인『자치통감』을 쓴 사마광(1019~1086, 67세)의 7세 때 일화를 다소 변형하여 꾸민 이야기다. 파옹구우破甕救友의 고사성어다. 다소 당돌하면서도 재치가 있는 행위지만 사마광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다. 이해타산에 얽힌 어른들의 행동을 항아리를 깨듯 한순간에 부숴버릴 수 있는 순수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권위가 있는 대감집의 것이라 함부로 손괴損壞할 수 없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 물건을 훼손했을 때 닥칠 후환이 아이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른들, 그것은 신분사회의 권위주의에 억압당해온 습성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이를 과감하게 깰 수 있는 것은 좌고우면하지 않는 일곱 살짜리 꼬마의 순수한 인명존중 사상이었다. 그래서 이를 염일방일拈一放一이라는 또 다른 성어로 교훈한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버리라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이지만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대일의 법칙, 이를 지키지 못해 평생 동안 쌓아온 명성과 인격을 망치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보고 듣는다.

 

  사마광은 북송시대 후기의 인물이다. 송나라를 개국한 조광윤은 지방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당나라가 망하고 혼란이 계속되는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문치文治주의를 단행했다. 그 전개 과정은 훌륭했다. 수도 개봉開封은 불야성을 이루는 인구 천만 명의 도시로 성장하여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을 발명하여 르네상스와 같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무를 배격한 문치주의는 행동성이 없는 논리의 주장으로 당파를 가르는 한계를 드러냈다. 국방을 대비하지 못해 오랑캐라 얕보던 거란과 서하 西河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치욕적인 조약을 밎고,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며 나약한 평화를 유지했다. 그런 중에도 사변적思辨的 이론을 따지는 문인들은 국가와 백성이라는 큰 정치보다는 눈앞의 권력을 위해 당쟁을 벌였다.

  사마광이 항아리를 깨는 행동에서는 어린아이의 재치를 읽을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는 교훈이 있다. 즉 보수적 가치를 탈피한 개혁적 인물의 가능성을 전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마광은 개혁을 주장하는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보수주의 구법舊法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단순한 일화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어른들이 각색한 싱거운 이야기로 보이는 이유다. 파옹破甕의 순수성으로 예견된 사마광의 정신은 인본주의의 큰 정치였다. 노회한 정치인의 철학을 어린이의 행동과 맞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으나 인간의 가치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아쉬운 예인 것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주장에 사변적 이론을 강화하면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당쟁은 격해진다. 개국과 쇄국으로 분열되어 조선이 망했듯이 송나라도 신법과 구법으로 혼란에 빠져들어 나라가 망했다.

 

  21세기 한국인은 술래잡기나 하는 철부지가 아니다. 분명히 자신의 당론을 스스로 정할 만큼 성숙했다. 그런데 아직도 정치인들은 하나를 잡은 손으로 또 다른 것마져 잡으려 한다. 그래서 국민은 자신의 이론을 강화하는 정치인처럼 발언권이 세졌다. 권력과 명예를 갖춘 존경받는 인물이 없는 까닭이다. 더구나 돈까지 마저 쥐려 한다. 백성들이 정치를 혐오하며 등을 돌리는 이유다. 돈과 권력을 마저 잡으려는 욕심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거란과 서하와 같은 강대국들이 무리한 세폐를 강요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정치는 아직도 항아리 속 아이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만 있다. 7세 신동의 순수한 마음으로 항아리를 깰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마광은 없는 것일까. 송나라가 망한 것은 문화를 숭상해서가 아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인들의 국론분열적 이기주의가 패망의 원인이었다. 정치인은 물론 우리 모두가 잡으려집착하기보다 버리고 비우는마음, 즉 염일방일拈一放一의 정신을 살려낸다면 살만한 세상이 이루어져 큰 항아리에 빠진 아이도 안전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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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온문학』 2021-봄(27)호 <권두언> 전문

  * 강기옥/ 시집『빈자리에 맴도는 그리움으로』『오늘 같은 날에는』『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등,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사료조사위원, 내외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