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故 김점용 시인 추모글: 이름을 불러본다/ 정진혁

검지 정숙자 2021. 5. 24. 16:14

<故 김점용 시인 추모글>

 

    이름을 불러본다

 

    정진혁

 

 

  "대패는 장대패가 좋다 어미날에 덧날을 끼우고 손은 머리를 감싸듯 가볍게 잡되 오른손은 대패 뒤꽁무니와 구멍 중간을 단단히 잡는다 발에 무게 중심을 두고" 김점용 시인의 「눈물을 깎는 법」 일부이다. 시인을 처음 만나 손을 잡았을 때 손이 두툼했다. 나는 그 두툼한 손이 좋았다. 교수를 하다 목수 일을 배우던 때이다. 두툼한 손은 복 많이 받을 손이라는데 점용 시인 복을 밚이 받았는지?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로 건너가는 동안 우리는(박홍 시인, 문정영 시인, 김점용 시인, 그리고 나)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대해 이야기한 것 같다. 사회의 모순과 아픔들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 점용 시인의 말이 아련하게 슬펐다. 횟집에서 술을 마시고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 바닷가에 둥그렇게 앉아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그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고 결국 막배를 놓쳤다. 어둠 속에서 힘겹게 집에 와야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으나 뭔가 슬펐다. 인간적이고 순수하고 낭만적인 느낌이었으나 슬펐다. 순수하고 다정한 동자승 같은 표정 그의 마지막 영정 사진도 그랬다. 그래서 더 슬프다.

 

  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불러 세우는 일이다. 김점용,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못다 한 관계의 서러움이고 보고 싶음이고 저세상에서 문득문득 서서 여기를 생각하는 점용이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용이를 잘 몰라서다. 점용 시인의 겉만 빙빙 돌고 안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겉과 속은 어디서 만나는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출생의 비밀을, 성장 과정을, 누군가의 겉으로 드러난 정보를 찾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을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점용 시인을 알지 못했다. 손이 두툼하다는 것 외에는 그래서 점용이의 이름을 자꾸 부르는 거다.

 

  이름을 부른다. 어디선가 여기를 바라보고 있을 김점용 시인. 거기 겉과 속이 만나기를 기다리는 막연한 시간대에······

 

   -------------------

   * 『시산맥』 2021-여름(46)호 <작고시인 특집>에서

   * 정진혁/ 충북 청주 출생,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간잽이』『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