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오숙, 다섯 개의 내음/ 차유진

검지 정숙자 2021. 4. 30. 18:11

<2021, 제37회 시와정신 신인상-차유진(포에세이) 당선작> 中

 

    오숙, 다섯 개의 내음

 

      차유진

 

 

  쪽 찐 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그녀는 고작 스물여섯에 남편을 잃었다. 시린 겨울이면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홀로 새벽을 밝히던 여성이었다. 가끔 연탄 불구멍에 담배를 가져다 불을 붙인 후 뻐끔거리며 쓴웃음을 짓던 그녀는, 나의 할머니다. 꿈에라도 보고픈, 또 다른 내 어머니. 

 

 

      # 애틋, 글내음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글을 쓰고 시를 읽던 꽃 같은 사람이었다. 릴케가 말했던가, 쓰지 않으면 살아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고. 왜 할머니가 그토록 글을 쓰셨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듯도 하다. 이제야 알아서 미안하고.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의 향을 사랑하던 사춘기 시절, 실컷 외롭고 싶거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슬픔 같은 것들을 끄집어내고 싶어도 혼자만의 공간이 없었다. 가족들이 잠들 때까지 망연스레 시간을 흘려보내다 적막을 얻으면 아질아질 깨어나 조용히 일기장을 열었다. 그렇게 밤을 앓고 있는 내 곁을 묵묵 지켜준 할머니. 어디선가 초를 꺼내어 노오란 불빛을 키워 조용히 건네주시던 분. 글을 써야 내가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셨던 게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나는 들어드리지 못했다. '첫 직장 얻거들알, 첫 월급 타거들랑, 그 돈으로 빨간 내복 사지 말고 붓 한 자루만 사다오.' 글을 사랑하던 사람에게 붓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건만, 나의 취업은 할머니의 하늘나라 문이 열리기 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주인 잃은 벼루와 먹, 그리고 낡은 붓 한 자루. 할머니가 남겨주신 것들이 내게 속살거린다. 애틋하고 절절한 것, 글내음 만한 것이 있으랴.

 

 

      # 설렘, 소리내음 

 

  그해 봄, 갓 스물을 넘긴 나를 끌고 할머니는 구포역 앞 레코드 방으로 향했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야지 참으면 못쓴다.' 역 앞에 걸려있던 기타 한 대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할머니의 쌈짓돈과 맞바꾼 저 귀한 것을 나는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삶의 여백을 채우는 방법을 누구보다 지혜롭게 알려주신 할머니 덕분에 지금껏 내 삶에는 소리가 흐른다. 통기타를 가만가만 안고 줄을 하나씩 튕기면, 심장으로 스며드는 따뜻한 울림이 언제나 꽃등처럼 찾아온다. 슬픔과 마주치는 순간들을 견디게 했고, 제자의 눈물을 닦을 수 있게 했고, 시난고난한 인생에 사랑을 찾게 했던 할머니가 남겨주신 기타. 나는 이것에게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마흔다섯의 봄날,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악기사로 향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곱게 살아가던 그녀는,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기타를 배워보고 싶다는 말을 투명하게 전했다. 동생의 눈에서 스무 살의 나를 만났고, 그렇게 나는 할머니의 기적 릴레이를 이어가기로 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해, 참으면 못쓴다.' 앙증하니 이쁜 기타를 멘 동생의 뒷모습이 바삭한 마음을 적셔준다. '할머니 나 이렇게라도 갚고 싶었어.'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이 유난히 청신한 날, 할머니의 소리내음 속에서 우리는 설레었다.

 

 

      # 푸근, 흙내음

 

  '나는 여덟 통 짊어질 테니 너희는 각각 두 통씩 들고 따라오너라.' 어깨에 척하니 약수통을 넣은 가방을 짊어지고, 할머니는 우리들의 대장마냥 앞서 걸었다. 어린 시절의 뒷산, 그 푸근한 흙내음이 기억하는 계절이다. 나는 그 시절에도 약수통보다 더 무거운 생각들을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거리던 아이였다.

 

  산에서 만나는 초록빛의 생명들은 나를 자라게 했다. 산에 오르는 일은 사람을 벗고 동물을 입는 일, 모든 촉수가 살아났다. 할머니는 어린 우리에게 솔방울을 주워 놀게 하고, 맨발로 흙을 밟게 하고, 바람으로 세수하는 법을 익히게 했다. 밤새 비가 온 다음날의 숲을, 나는 가장 사랑했다. 잘 익은 도자기 빛깔의 흙을 밟을 수 있는데다 코끝에는 싱그러운 풀 냄새가 머물러 주었기에. 햇살이 나무 사이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다시 부서져 내릴 때면 나는 무수한 찬란을 맞이했다.

 

  삶의 고비마다 할머니 어깨를 누르던 약수통을 생각한다. 할머니는 가족의 걱정을 가방에 담아 산에 뿌리고, 다시 그 가방에 희망을 담아 내려오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마르지 않을 수 있었고, 이 땅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었다. 다시 걸어본 만덕의 뒷산에서 할머니를 닮은 흙내음이 난다. 짙어서 더욱 아릿한.

 

 

      # 낯섦, 길내음

 

  '방학'과 '덜컹거리는 버스'는 내게 같은 말이다.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엄마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고자, 할머니는 방학만 되면 우리 자매들을 이끌고 시골로 향했다. 고향 가는 할머니는 예뻤다. 설렘이 사람을 예쁘게 한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에 배웠다. 완행버스는 고작 합천을, 중국 길림성 정도로 느껴지게 했다. 그리고 그 낯선 시간들 속에는 언제나 삶은 달걀과 김밥과 사이다가 동행했다.

 

  아이들의 등장에 시골 동네는 금세 소란해졌다. 할머니를 복사 붙이기한 것 같은 새 할머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우리를 실컷 안고 만져야 시골의 첫날이 지나갔다. 방학 내내 우리는 매일같이 낯선 공간을 채색했다. 방앗간 담벼락에 붙어 낙서를 하고, 마당에 물그림을 그리고, 이파리를 찧어 소꿉놀이를 했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출렁이고 향기로웠으며 넉넉했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약속된 날, 할머니 한 분이 장에서 사왔다며 오색이 찬란한 플라스틱 목걸이를 건네었다. 괜히 코가 아파왔다. 저 목걸이를 하고 다시 이 길을 찾아와야지···.

 

  살면서 나서야 할 일이 많아졌다. 길을 낸다는 것은 어쩌면 삶은 달걀처럼 둥글게 어울리고, 김밥처럼 든든하게 버티고,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웃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 삶의 모든 낯섦 앞에 할머니와 걸었던 그 길내음을 뿌려둔다. 조금 아파도 나는 가벼워지리라. 다만 늦어도 나는 다시 싱싱해지리라.

 

 

      # 비나리, 살내음

 

  '어서 내려오라'는 엄마의 다급한 전화에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 집에 도착했으나, 대문 앞에는 청사초롱만이 황량히 빛나고 있었다. '왜 벌써 잠들려 그래? 할머니 붓 못 샀어.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는 빌었다. 평생 나를 위해 빌었을 당신의 마지막을 향해 가장 따뜻한 숨을 담아 간절하게.

 

  돌아가신 지 일 년을 다 채워가던 어느 날 밤, 할머니는 나와 동생의 꿈에 동시에 나타났다. 그날 밤, 하얗고 산뜻한 할머니의 살내음을 맡았다. 노래는 바람처럼 흐르게 하고, 글은 햇살처럼 스미게 하라는 것을, 나는 그 말랑한 살 속에서 배웠다. 다섯 개의 내음으로 언제나 기억되는 내 할머니, '전오숙' 여사. 내가 무엇을 간절해하는지, 그 간절함을 어떻게 이어나가고자 하는지를 나보다 더 고독하게 뚫어보던 사람. 내 영혼을 매만지며 이토록 삶을 따스하게 만들어준 사람.

 

  그리움 짙은 밤, 북쪽 바람 앞에 비나리 한 자락을 걸어본다. ▩

 

 

   * 심사위원: 김완하  송기한  김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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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정신』 2021-봄(75)호 <제37회 시와정신 신인상 당선작>에서

   * 차유진/ 부산 출생,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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