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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사상(思想)/ 송민호

검지 정숙자 2020. 4. 12. 16:06



    '어린이'라는 사상思想

    - 소파 방정환의 문화기획과 읽을거리 감각


    송민호



  1. 「개벽」의 시대, 문화기획자로서의 방정환

  '방정환(方定煥, 1899~1931, 32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바로 '어린이'라는 명칭이나 '아동문학가'로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근대 이전 한국에서는 단지 어른의 부속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어린이'의 독자성을 처음으로 규정하고 어린이와 관련된 다양한 출판, 강연, 문화 활동을 전개했던 그의 이력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그를 단지 '아동' 내지는 '아동문학'과 관련시켜서만 이해하는 것은 조금은 아까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1920년대 민간신문들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대중 미디어라고 할 수 있을 잡지 『개벽』을 발간하던 천도교 기반의 '개벽사開闢社'에서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였고, 그 뒤로 『개벽』의 편집진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여성』등의 잡지 편집도 책임을 맡았고, 이어 『별건곤』, 『혜성』등으로 이어지는 잡지 시대의 밑바탕을 마련한 뛰어난 잡지 편집자이자 문화기획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 이후 10여 년간 총독부에 의해 언론 통폐합이 이어지다가 1919년 3 · 1운동 이후 민간신문들이 허용되고 조선인들에 의한 잡지들의 발간 역시 비교적 자유로워진 시기, 잡지 『개벽』은 식민지 조선과 그 주변에서 일어났던 정치, 사상, 문화, 노동 등 다종다양한 지식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독립신문》으로 시작되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등의 신문들이 폭발적으로 창간되었던 일제강점 이전, 당시 한국인들이 처음 경험했을 공론장의 충격과 일제에 의해 억눌인 공공성에 대한 욕망을 고스란히 이어주었던 것이 바로 잡지《개벽》의 자리였던 셈이다. (p.4-5)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천도교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세 번째 사위였던 방정환이 처음부터 『개벽』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방정환은 『개벽』편집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적이 없었다. 『개벽』이 창간되어 나올 무렵에 그는 일본 동경에 유학을 떠나 있던 상태였다. 3.1운동 이후 한국와 일본에서 이런저런 사건들에 휘말려 경찰에 체포되면서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그는 1923년에 잡지 『어린이』를 동경에서 창간하고 여름에 순회강연을 하러 한국에 왔다가 그때부터 개벽사에서 잡지 편집에만 전념하였다. 사실 개벽사 사무실 하나에서 『개벽』, 『어린이』, 『신여성』등의 잡지들이 바쁘게 편집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담당하는 잡지 편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로 도와가면서 잡지가 발간되었을 것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1920년 발간 당시 잡지 『개벽』의 편집을 누가 담당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용서의 최근 연구가 꽤 상세하다. 역사학자인 그는 잡지 『개벽』하나만이 아니라 '개벽사'라는 보다 큰 단위로 연구의 시각을 넓혀 여기에서 나오고 있던 잡지들의 편집 주체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상세한 연구결과를 보여주고 있다.(정용서, 「개벽사의 잡지 발행과 편집진의 역할」, 『한국민족운동사연구』83, 2015, 145-186쪽) 이에 따르면, 『개벽』초기에는 이돈화(편집인), 김기전(펀집국장), 박달성(사회부주임), 차상찬(정경부주임), 현희운(학예부주임) 등이 편집을 담당하였는데, 1922년 『부인』이 창간되며 현희운이 『부인』의 편집 책임으로 옮겼지만 곧 그만두었고, 그 자리를 박달성이 맡았던 것이다. 방정환은 1923년 3월부터 『어린이』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다가 1924년 4월에는 『부인』의 후속 『신여성』의 편집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창기 『개벽』의 편집자들은 대부분 천도교에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이었다. 물론  천도교  내에서 기관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천도교회월보』1910년에 이미 창간되어 있었으므로, 천도교 기관지로서가 아니라 식민지 지식의 공론자으로서의 잡지 『개벽』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초창기부터 어느 정도 합의가 존재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무렵 편집진들의 구성을 보면 당시 이 잡지의 스펙트럼이 그리 넓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을 가늠할 수 있다. 초창기 『개벽』은 주로 천도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는 적극적 구독자들의 구독을 통해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p.5-6)

  『개벽』이 일반 독자들을 확보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1920년 말부터 시작된 필화사건 등의 통해 검열 당국의 견제를 받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개벽』은 일제 검열 당국과 당당히 맞서면서 민족적 지향을 담보하는 언론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천도교 사상에 대한 연구 내지는 서구 사상의 소개, 노동이론, 문예이론 등 갈 곳 없이 떠돌던 식민지의 공론들이 제멋대로 안착하는 기항지와도 같았던, 초기 『개벽』잡지의 자리를 단단히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천도교와 민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개벽』이 대중적인 지식을 다루는 전문 잡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방정환이 개벽사 편집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별마다 전문적인 기획이 이뤄진 것이나 1924년 말에 방정환의 주선으로 입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영희가 『개벽』의 문예주임 등을 맡으면서 잡지 『개벽』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1년 『동광』8월호에 '김만金萬'이라는 필자는 방정환이 별세하기 직전 편집기자로서 그를 평하며, "조선서는 잡지왕국이라 할 개벽사 2층에는 편집실에 북극의 북극곰[白熊]모양으로 혼자 들어앉아서 연방 담배를 피워 물고 『혜성』, 『신여성』, 『어린이』의 매호 편집 목차에 하루 같이 땀을 흘리는 동씨는 개벽의 잡지왕국의 총리라는 관도 없지 아니하거니와 그보다는 몸뚱이가 뚱뚱하고 부지런한 것이 '노력하는 곰'이라는 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은 필자만의 특수감은 아닐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의 이러한 기록은 당시 잡지왕국이라는 개벽사의 위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중심에 바로 북극곰 같이 꾸준히 여러 잡지들이 편집에 매진했던 방정환이라는 존재가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p.6-7)



  2. '어린이'라는 사상 :잡지 『어린이』에 이르는 길

  이처럼, 개벽사라는 '잡지왕국의 총리'격이었던 방정환은 1931년 7월 병으로 별세하기 전까지 개벽사에서 발간되던 수많은 잡지들의 편집에 관여하고 있었다. 1926년 8월 『개벽』은 72호까지 발행되고 난 뒤, 결국 경찰에 의해 발행금지 처분을 받고 폐간되었다.

  방정환은 『개벽』의 폐간 이후 개벽사의 잡지방향을 '취미'와 '과학'을 갖춘 잡지로 규정한다. '취미'는 읽을거리와 관련된 대중 취미를 가리키는 것이거니와 '과학'이란 바로 당대적인 의미로 '사회주의'의 사회과학 내지는 정치, 시사 관련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벽』에 이어진 『별건곤』 바로 '취미'만을 중심으로 하는 잡지로 방향 방정환은 신영철과 차상찬을 이 『별건곤』의 편집 책임으로 삼았다. 그리고 '취' 본위의 잡지안 만큼, 파격적인 호별 기획 등을 통해서 넓은 대중적 저변을 확보하였다.

  방정환이 구상했던 '취미'와 '과학'을 갖춘 종합지로서 실현된 것은 바로 『혜성』(1931.3~1933.3, 중도에 『제일선』으로 개칭)이었지만, 방정환의 사후 이 잡지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이 『혜성』은 『삼천리』(1929.6~1942.7)와 함께 『신동아』(1931.11~ ), 『조광』(1935.11~1948.12) 등으로 이어지는 취미와 시사를 함께 다루는 대중적인 종합잡지 시대를 여는 시작점이 되었다.

   당시 개벽사에서는 이처럼 많은 잡지들이 발간되고 있었지만 방정환에게 있어 항상 활동의 중심이 되는 것이 잡지 『어린이』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923년 3월 동경 유학 시절 창간하여 아무리 다른 잡지 풀간으로 바쁜 시기라고 하더라도 잡지 『어린이』의 편집을 등한이 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방정환은 언제나 시간을 내어 동화를 번역하거나 창작하였고, 다양한 필명을 동원하여 어린이들의 읽을거리를 써서 잡지에 실었다. 어쩌면 그에게 '어린이'는 단지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의 대상 독자나 주제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주의主義였고 사상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p.7-8)

  방정환이 언제부터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이력서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작가연구와 평전이 출판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염희경 선생의 책이 꽤 소상하다.(염희경, 『소파 방정환과 근대 아동문학』, 경진출판, 2014.) 여기에 따르면 방정환은 1908년 불과 시천교 하에서 권병덕이 조직한 어린이 토론 연설회인 '소년입지회'에 참여하여 토론을 배웠고, 권병덕과의 인연으로 나중에는 손병희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육당 최남선이 자신이 연 신문관 등의 출판사를 통해서 발간하던 어린이 잡지인 『소년』(1908.11~1911.5.)이나 『붉은 저고리』(1913.1~1913.6), 『새별』』(1913.1~1915.1), 『아이들 보이』』(1913.9~1914.8) 등의 잡지들을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 시기 그가 읽었던 아동 잡지들이 이후 『어린이』창간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비록 이때 발간된 잡지들이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 같이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폐간되어 버린 것은 당대 아동을 위한 '읽을거리'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결과론적인 오류를 무릅쓰고 지금 관점으로 평가해 본다면, 육당이 주도하여 창간된 잡지들에 실린 기사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흥미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 지식이나 민족에 대한 이해 등 계몽성이 강조되어, 어른의 시각에 의해 재구성된 독물讀物 감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10년 뒤에 발간된 『어린이』에 실려 있는 기사들이 계몽성을 빼고, 좀 더 자유로운 상상력과 사고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잡지 『어린이』가 앞선 다른 어린이 잡지에 비해 비교적 오랜 기간 발간되었던 배경이나 이후 어린이 잡지들의 새로운 원형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바로 계몽성을 배제한 채, 어린이의 읽을거리를 대했던 일종의 사고 전환이 놓여 있다고 볼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p.8-9)

  일제강점 초창기에 발간되던 어린이 잡지들을 보면서 꿈을 키웠을 어린 방정환의 눈에 과연 그러한 차이가 명료하게 드러났을까. 이후 손병희의 사위가 되어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진학하고 난 뒤, 1919년 1월 류광열, 이중각, 이복원 등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만들어 기관지 『신청년』을 발간하게 되고, 또 같은 해 12월에는 『녹성』이라는 영화잡지를 발간하면서 방정환에게는 잡지라는 매체에 대한 강렬한 끌림과 함께, 매체를 통해 사상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앞서 방정환이 주도하여 결성한 경성청년구락부는 초반부에는 비밀결사 형태로 운영되다가 3.1운동 이후 잡지 『신청년』3호부터 그 존재를 명확하게 밝혔다. 이 잡지의 4~6호는 박영희, 나도향, 최승일 등이 편집을 맡았는데, 이 때의 방정환과의 인연으로 박영희는 1924년 개벽사의 문예부주임으로 편집에 참여하게 된 셈이다.

  즉, 방정환에게 있어 사상적 지향의 영역이 된 '어린이'와 그 표현 매체로서 잡지 『어린이』는 실제로 그가 유학 갔던 기간 동안 동경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보다 앞서 이미 방정환의 내부에서 그 기본적인 구상이 만들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그가 청강생으로나마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 적을 두었던 자체가 아동문학이나 그러한 잡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도요대학은 일본에서는 독특하게도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라는 일본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철학자가 1887년에 건립한 전수학교인 사립 철학관이 1903년에 개명하여 종합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인도철학과나 중국철학과, 그리고 문화학과와 사회사업과(1921년 신설) 등을 설치해 두고 있었고, 특히 당시 한학에 이해가 있었던 조선인들이 중국철학과에 많이 진학하였다. 따라서 방정환이 도요대학을 선택한 것은 이 대학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던 누군가의 추천이거나 문화학과와 사회사업과를 목적으로 한 방정환의 의도적인 진학일 가능성이 있다. 방정환은 앞선 육당 최남선이 그러했듯, 일본 유학을 통해서 향후 그가 조선에서 펼치게 될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잡지, 출판 활동에 대한 일정한 전망을 얻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p.9-10)

  물론 방정환의 동경 유학이 전적으로 그가 어린이에 대한 관점을 획득하고 나아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된 전적인 요인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서도 살폈듯 그는 이미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이미 진작부터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방정환은 동경 유학 시기 학업에 전념하기보다는 연극 활동이나 청년회 활동에 열성이었고, 여러 차례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며, 일본에 있으면서도 잡지의 편집에 관여하거나 때때로 조선에 건너와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에게 있어 제도로서의 학교나 일본 유학이라는 경험이 그다지 큰 의미를 갖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일본에 유학 가 있던 동안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일본에서 발간되던 아동잡지들의 형식이나 서구에서 번안된 다양한 읽을거리들을 탐독하면서 잡지 『어린이』를 꾸려갈 실제의 전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에게 있어 일본 유학이란 동시대 다른 지식인들처럼 보다 젊은 바다 속에서 전망을 얻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확립된 전망을 구체화라는 계기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도쿄에 유학하는 도중인 1922년 7월에 '개벽사'에서 10여 편의 서구 동화들을 번안하여 『사랑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펴내기도 하고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나 오스카 와일드의 「왕자와 제비」등을 번안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의 일본 유학시절은 동화의 번안에 푹 빠져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잡지 『어린이』의 준비이자, 그가 그리고 있던 어린이에 대한 사상이 번안과 잡지의 창간으로 실현되었던 계기였다.



  3. 마무리하며 : 어리고 미숙한 존재들을 위한 문학의 자리

  한국 문학사에 있어 '방정환'이 갖는 의미는 여러모로 각별하다. 물론 그는 문단에 걸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동화 몇 편을 번안하고 창작하였으며, 개벽사의 잡지 편집에 관여하여 『어린이』라는 잡지를 별세하기 전까지 꾸준히 내왔던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사의 한 켠에 그만큼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그가 지향하는 삶과 문학의 지향 속에 '어린이'라는 뚜렷한 존재가 사상화된 형태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어린이'는 계몽주의나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도구가 될 수 없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의'였다. 믈론 그것은 정치나 경제 영역이 될 수 없는 문학이 사회의 내밀한 사적 영역 속으로 파고드는 방식이기도 했다. 방정환은 가장 어리고 미숙한 존재들인 아동을 위한 읽을거리를 전해주고 그것을 도구화하는 이념은 배제하는 방식으로 앞선 시대 아동 잡지의 선구자였던 최남선과는 다른 새로운 계몽성을 창안하였던 셈이다.

  어린이는 비록 어리고 미숙한 존재이지만, 그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숙함 속에서 뒤에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하는 지향성을 발견하는 것은 결국 어른들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민족이나 계급적 전망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채워 읽는 것은 결국 어린이의 존재를 타자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방정환이 도달한 계몽이 지워진 계몽성이라는 영역은 바로 그런 사상의 발로였으리라.

  비록 이 짧은 글을 통해 그의 모든 삶의 굴곡을 다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개벽'이라는 당대의 잡지사를 운영하며 시대적 지식 취미와 문화적 혜안을 드러내고, 『어린이』라는 다시없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어린이 전문지를 통해, 어린이라는 사상을 전파했던 방정환의 삶을 문학계에서 여러번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만큼은 기꺼이 공감해 주시기를 바란다.(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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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 2020-봄호 <기획특집/ 개벽 · 방정환 · 어린이>에서

  * 송민호/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저서『이상이라는 현상』『언어문명의 변동』